덩샤오핑의 딸 덩룽(鄧榕)이 덩샤오핑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유럽에서 유학할 당시 누구와 가장 가깝게 지내셨나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덩샤오핑이 입을 열었다. “저우언라이 동지란다.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였지. 프랑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공부하면서 함께 살았단다. 나에게 그는 언제나 형이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혁명의 길로 들어섰고, 그는 동지와 인민들로부터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덩샤오핑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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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는 늘 간부와 병사들에게 민간인들이 국민당 부대의 약탈과 학살 등에 시달려 생활이 피폐해있으므로 민가에 절대로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스완진(石灣鎭)을 지날 때에는 곡식들이 제대로 추수되지 못해 논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간부들이 그 곡식이 국민당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불살라 버리자고 주장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안 된다. 곡식은 인민의 피와 땀이다. 한 뿌리도 불 태워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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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총리가 저우언라이와 대회를 나누다가 한 가지 우화를 이야기했다. 커다란 코끼리가 숲속에서 사냥꾼이 놓은 그물에 걸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그물을 한 올 한 올 입으로 물어뜯어 코끼리를 살려주었다는 이야기였다. 미얀마 총리는 중국이 바로 이 코끼리이고, 미얀마는 토끼라면서 중요한 시기에 미얀마가 중국을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그의 속뜻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중국은 나라의 크기와 관계없이 모든 나라를 평등하게 대할 것입니다. 중국은 인구는 많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 개발도상국에 머물러 있습니다. 앞으로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도 옛 친구를 잊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훗날 미얀마 총리는 “저우언라이는 대국의 지도자이면서도 약소국의 지도자와 회담할 때 언제나 평등한 태도로 대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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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베이징 시에서 대중교통이 부족해 사람들이 불편을 겪자, 저우언라이는 어느 날 저녁 혼자서 중난하이에 있는 집무실을 나와 북문 밖에 있는 베이징도서관 앞에서 버스를 탔다. 그리고 얼마 후 버스에서 내려 전차로 갈아타고 베이징 시내를 돌며 대중교통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퇴근 시간이라 차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는데, 누군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결국 차의 승객들이 모두 그가 저우언라이라는 것을 알고는 너도나도 앞 다투어 자리를 양보했다. 하지만 그는 모두 사양한 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승객들과 대화를 나누며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중난하이로 돌아온 그는 곧장 관련부서에 교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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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우언라이 동지가 끝까지 버티지 못했더라면 린뱌오와 장칭 등 반혁명 세력들이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농단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공산당이 몰락하고 나라는 분열되고, 또 군대도 구심점을 잃고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며, 경제가 완전히 파탄해 국민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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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1일 공산당 창건기념일, 톈안먼의 성루에서 노동자 출신의 중앙위원 웨이펑잉(尉鳳英)은 선양에서 가져온 마오 주석의 초상휘장을 저우언라이에게 보여주며 “새로 나온 휘장인데, 누가 가져다 준 걸세. 반짝반짝하지?”라고 자랑했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웃으며 “자네들 것은 언제나 변하는군. 내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는 자기 가슴에 달려있는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라고 적힌 휘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것이 제일 좋네.” 그는 공정을 중시하고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쳐 인민을 위해 이바지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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