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번이 생각하지만, 나는 이름에 꼼짝 못하는 성격이다. 책이든 CD든 제목만 보고도 갖고 싶어 안달하는 일이 종종 있다. 가끔 마권을 사는데, 그것도 말의 이름만 보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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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말에 휘둘리다니, 하고 가끔은 나 자신을 비웃지만, 한편으로는 말에 휘둘리지 않으면 소설가로선 끝장이란 생각도 든다. --- 「칵테일의 이름」 중에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한다. 그래서 생각의 결과인 ‘결심’은 모두 욕조에서 이루어졌다. 소설의 제목과 결말, 나 자신의 행동까지-여행을 떠날까, 결혼을 해야겠어, 이혼할까 봐, 아니 역시 이혼은 하지 말자-모두 욕조에서 결정했다. ---「욕실」 중에서
내 기억 속에 있는 아빠 서재의 중심된 냄새는 정신의 그것이다. 집필에 몰두할 때, 쫓기고 있는 정신의 냄새, 또는 고뇌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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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방은 아빠의 서재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지난 몇 년 동안 그 방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깜짝깜짝 놀랐다. 아빠 서재의 냄새가 났다. 똑같은 냄새가. 며칠을 계속해서 원고를 썼을 때, 예정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밖에 나가는 것조차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나는 사방을 돌아본다. 방의 모습은 전혀 다른데, 냄새만 똑같다. 순간적으로 우뚝 섰다가, 마침내 피식 웃고 만다. “아빠, 나 쫓기고 있어.” 하고, 아빠에게 말을 건넨다. ---「서재의 냄새」 중에서
복잡한 전철을 탔을 때면 간혹 생각한다. 모두들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 과거 어느 때에는 모두 어린애였다. 거짓말을 하고 투정을 부리고 울고 떼를 쓰고 목욕을 싫어하고 잠자다 오줌을 싸고 이를 닦지 않는 어린애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신기하면서도 끔찍하다. 말이 통하는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애가 성장했을 뿐이다. 그러니 믿을 수 없다.
--- 「괜찮다는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