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림이 고개를 들었다. 명우는 은림이 누구보다 오래 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과학적이던 명 선배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던 자신보다, 비과학적이라고 그녀를 비난하던 후배들보다 은림 혼자 오래오래 남아 있었다. 은림은 지금 그것이 다 오빠 때문은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난 지난 겨울에, 사람들 다 떠난 회관에 앉아 있다가 불현듯 그걸 생각해낸 거야.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한간, 그토록 매료 시켰던 건, 그건...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였어.'
--- p. 131
와글바글한 곱창 집 한구석에서 박수소리가 터지고 한 여학생이 좌중의 시선을 받으며 일어섰다. 생머리가 길게 내려오고 발목까지 오는 조끼를 입은 여학생이엇다.
'긴 머리 긴 치마를 입은 난 너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짧은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가 너의 첫인상이 었어.'
박수소리는 노랫소리에 맞추어 울리고 남학생들의 환호소리는 커져갔다. 경식과 명우의 눈길이 그들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돌아왔다.
'대학생들인가 보지?'
'응.'
'우리하곤 참 다른 거 같지.'
'다르지...... 달라야 하고. 안 다르면 어떻게 하겠니? 다만 어떻게 다를 것인가는 저들의 몫으로 남겠지.'
'그래, 그럴거야. 그나저나 넌 생계는 어떻게 이어가니?'
'그럭저럭.'
--- p.184
씹힌다는 의미로밖에 번역할 수 없는 퍽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퍽이나도 강렬해서 그는 탕수육을 씹다 말고 넋을 잃은듯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처럼, 화면속에서도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놀라는 사람들, 만류하는 뚱보 중년 사내... 하기는 미국의 인간들이라고 해서 저런 대사를 그냥, 아무 충격 없이 넘겨 벌릴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아까 그 장면이 나올 때 천천히 씹다 만 탕수육 때문에 목이 멜까 맥주를 마셨다. 한 대 맞은 기분이었고 좀 떨떨하긴 했지만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 쾌감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빙그레 웃어 보았다.
--- p. 79
비는 사정없이 창밖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단한가지 사실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가 노란 할로겐 스탠드를 켜고 흰포도주를 마시며 여경과 안락한 섹스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은림은 파란비닐우산을 쓰고 거리를 걸어다녔을 것이다. 다만 그때는 그것을 잊었고 지금 그는 그것을 기억해냈을 뿐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엌의 찬장을 열었다.
--- 2002/05/30 (kang210)
'뭐가 그렇게 절망스럽나요. 뭐가 그렇게 어리석었었나요? 연애도 제대로 못 해보고, 운전면허 하나 따지 못하고, 고시공부 한번 하지 못하고 보낸 젊은 날이 그래서, 이제 와서 그렇게 안타까운 건가요? 그래서, 이제와서 우린 어리석었다고, 우린 다 잃어 버렸다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건가요? 고작 형의 회환이라는게 이런 건가요? 우리가 애썼던 날들하고 바꿀 수 있는 게 고작 운전면허에요?
아니요,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잊지 않는 사람들, 죽어간 친구와 미쳐간 친구와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들.... 그들이 곧 이 나라를 이끌어 가게 돼요. 이제 곧 우리 세대에게서......그래요, 형 말대로 우리 세대를 거치느라 운전면허 하나 따지 못했던 젊은이들이...... 그들이 대통령이 되고 그들이 예술가가가 될 거라구요. 가짜들 말구 진짜들......
그것두 권력이라구 운동하지 않는 불쌍한 친구들 주눅들게 하면서 거들먹거렸던 사람들 말구, 이제 와서 어리석었다고 그 세월 전체를 매도하는 인간들 말구, 진짜들. 끌려가는 친구들도 있는데 미안해서, 정말 미안해서 테니스채를 사 놓고 한 번도 치지 못했던 친구들, 고시공부하다가 도서관 밖의 집회 바라보고는 머리를 싸매고 그날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 길거리에 누워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서로서로 사슬을 얽어매고 울었던 그 친구들.'
--- p.
난 어쩌면......... 정말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건지도 몰라.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이름이 유토피아라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상상했던 모든 좋은 세계에 대한 상상을 사회주의 속에 다 가져다부어놓고, 그것이 단지 꿈으로 끝날 수 있다는 상상은 해보지도 않았어. 다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어. 굳게 믿었지. 그리고 아직도... 아직도..... 그 미망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그때... 젊었던 그 사람들..... 그래서 우리 후배들한테 아직도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우리 후배들한테 전해 주겠어? 그애... 들은 우리들이 뭐 대단한..... 거라도 지니고 살았는 지 알아. 그럴 필요 없다는..... 말... 우리도 사실은 참 어수룩했다는 말.... 우리도 외로웠다는 말.... 그러니 그렇게 주눅 들지 않아도 그 애들이 이쁘다는 말을...... 해주겠어?
--- 본문중에서
나도 뭐 꼭 그런 사람들을 잘 알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신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 주는 사람들이잖아. 게다가 볼링도 못한다, 테니스도 쳐 본 일이 없다, 수영은 어렸을때 동네 바닷가에서 한 게 전부다.정말 재미없어.대체 그럼 학교 다닐때 뭘 했어요? 글쎄... 뭘 했었지?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학교 다닐때 무었을 햇던가.여경의 말 대로연주회도 안 가고,샤갈에게 관심도 없었으며 그리고 볼링이나 테니스 같은건 아예 꿈도 꾸지 않으면서 대체 그는 무엇을 했었던가. 술을 마셨지.싸움을 했고 그리고 노래를 불렀어.
--- p.85
그리고 그날 새벽, 오래 전에 잊혀진 약속처럼 첫눈이 내렸다. 하지만 은림이 본 마지막 세상은 어둠뿐인 메마른 도시였다. 그 도시를 덮는 첫눈을 보지 못하고 내리 사흘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어느 새벽 그녀는 명우가 잠깐 잠든 사이 눈을 감았다. 순간적이었지만 격렬한 악몽에 시달리다가 명우가 눈을 떴을 때 이미 그녀는 숨이 멎어 있었다. 잠이 든 것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명우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양초처럼 차가웠다. 목구멍이 꾸역꾸역 막혀 왔을 뿐 눈물은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 p.283
그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왠지 이제 더 은림에게 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는 은림의 얼굴을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절벽에 서있는 거처럼 그는 무언가 몹시 위태로운 기분을 느꼈다. 수심을 알아보기 위해 무심히 늘어뜨린 줄이 하염없이 그저 풀려 들어가기만 할 때 느끼는 그 이상한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 p.227
갑자기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친구들의 얼굴이 그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아직도 '시대착오적으로' '불화'하게 하는지, 대체 어쩌자고 이다지도 이 변화에 적응도 하지 못하는지……. 그리고 나는 어쩌자고 이 밤에 일어나 그들을 생각하고만 있는 건지……. 사실은 이 모든 게 한심했고, 한심했지만 나는 울컥 그들이 보고 싶었다. 그간 썼던 글들을 모두 지우고 이 소설을 시작한 것은 그날 이후부터였다. 벗어나려고 했지만, 나 역시 한때 그들과 함께 넉넉한 바다를 헤엄쳐 다니며 희망으로 온몸을 떨던 등이 푸른 자유였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등이 푸른 자유를 포기할 만큼 소금에 절여져 있지는 않으니까.
--- '작가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