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을 잠시 회상해 봅니다. 60세인 2006년 말에 직장에서 은퇴했습니다. 은퇴하기 1년 전부터 은퇴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두고 무척 고민했습니다.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젊었을 때부터의 오랜 꿈이던 해외 도보여행을 하면서, 더불어 노후를 봉사하면서 살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배낭여행의 목적지를 어느 나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책꽂이에 있던 배낭여행 관련 책 중 일단 한비야 씨의 책 네 권과 김남희 씨의 책 두 권을 통독했습니다. 모두 감명 깊게 읽었으나 특히 김남희 씨의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스페인 산티아고 편)』을 읽고서는, 아무런 주저 없이 첫 도보여행 코스를 ‘스페인 산티아고 길’로 정했습니다.
환갑이 되는 2007년 7월에 제주일주를 하면서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가기 위한 첫 도보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5박 6일간 190km의 제주일주를 하고 나니 도보여행의 묘미를 알 것 같았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무척 힘들었으나 마음만은 날아갈 듯 행복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제주의 오름 등반과 제주의 모든 유인도와 각종 도로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걷고 나서는 인터넷 서핑을 하며 산티아고 길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다행히도 산티아고에 대한 모든 자료가 업데이트 되는 좋은 사이트를 발견하고, 매일 그 사이트에 들어가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출발일자를 2009년 5월로 정하고 나서, 2008년 한 해 동안 제주 올레길을 82회 약 2,000여 km를 걸으면서 착실히 준비했습니다. 2008년 11월부터는 한 달에 평균 10~15일씩 매일 6~7시간 25km를 걸었으며, ‘카미노’ 카페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때부터 카메라를 구입하고, 찍은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준비하는 동안 애로점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첫째가 건강상의 문제였습니다. 심장병으로 3년 전부터 매일 약을 복용했습니다. 자주 부정맥이 발생하여 제주와 서울의 병원 등에서 수차례 검사와 진찰을 받았는데, 심방세동 외에 특별한 증상이 없으므로 계속해서 하루 두 번 약을 복용하면 된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심해지는 부정맥 때문에 늘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걷기 시작하여 2~3시간이 지나면, 오른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발생했습니다. 점점 심해져서 도내 병원을 전전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습니다. 지인이 모 대학병원의 발목 전문 의사에게 가보라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보고는 “이 발로 어떻게 그동안 견뎠느냐? 선천성 질환인데, 걷거나 뛰는 데 심한 지장을 가져온다. 치료방법으로는 수술밖에 없는데 나이가 많으므로 그냥 진통제를 복용하며 견뎌 보다가 정 못 견디겠으면 3년 후에 수술하자.”고 하였습니다.
심장 전문 의사와 발목 전문 의사는 장거리 도보여행을 극구 말렸으나, 나는 청년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도보여행을 이 정도의 난관을 가지고 포기하기엔 너무 억울했습니다. 비록 걷다가 쓰러져서 되돌아오는 일이 있더라도 꼭 가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항공권을 예약하지 않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여행계획을 연기하거나 중단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2월에 예약을 마치고 주위의 친지들에게도 미리 공개함으로써, 계획을 변경할 수 없도록 배수진을 쳤습니다.
처음 준비할 때는 하루 25km에 6~7시간씩 근 40일간 걷는 게 가장 큰 문제였으나, 꾸준한 연습으로 차츰 걷는 데도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약간 불안한 점은 걷는 도중 혹시 심장병이 도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언어소통 문제였습니다. 언어소통 문제는 『이보영의 여행 영어회화』 책을 mp3에 녹음하여 올레길을 걸으면서 늘 공부하였고, 스페인어는 약간의 기초를 공부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프랑스 파리 왕복 저가항공권 예약, 파리에서 도보여행 출발지인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까지 가는 테제베와 일반열차 예약, 산티아고에서 파리로 가는 저가항공 예약, 파리 민박집 예약 등을 어느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직접 했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특히 파리에서 생장피드포르까지 가는 여정은 불어로 되어 있어 더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준비과정을 다 마쳤더니 또 다른 암초가 생겼습니다. 인플루엔자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하루하루 확산 일로에 있었는데, 스페인에서도 환자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위에서는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환갑을 지난 나이에 혼자서 그런 장거리 도보여행을 가는 것도 이상하고, 세계경제가 어렵고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기에 여행을 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2009년 5월 8일 서울을 출발하여 프랑스 파리를 거쳐 5월 9일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도보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1년 이상 준비를 잘한 탓인지 언어구사나 걷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습니다. 발목 통증에 먹는 진통제는 2개월분을 가지고 갔지만, 아플 때만 먹으려고 일부러 먹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는 걸을 때마다 통증을 느꼈는데, 이곳에서는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한 번도 아프지 않았고 그 이후로 완치되었습니다. 완치된 이유를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스페인의 건조한 날씨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입니다. 스페인의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경관이지만 천 년도 더 된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과 오랜 역사가 묻어나는 소박한 마을들을 바라보고 걷노라면, 마음이 무척이나 평안하고 행복했습니다. 또한 도보길이나 숙소에서 알게 된 세계 각국 사람들과의 따뜻한 만남! 그들이 준 행복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6월 7일 산티아고, 6월 12일 피니스테레(Finisterrae), 6월 13일 묵시아(Muxia)까지 총 920km의 ‘산티아고 카미노 길’을 마치고, 스페인 마드리드와 프랑스 파리를 9일간 도보여행을 한 후 6월 24일 무사히 귀국했습니다. 막상 49일간의 첫 해외 장기 도보여행을 하고 나니 장기 도보여행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솟아나기도 했습니다.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한 달 이상의 장기 도보여행을 떠나자는 결심도 굳혔습니다.
2010년엔 서울에서 1년 동안 침과 뜸 수업을 받느라고 한 달 이상의 장기 도보는 못 떠나고, 그 대신 서울을 비롯하여 각 지역의 둘레길을 짧게는 5일 길게는 11일씩 걸었고, 100km 울트라 걷기대회에 참가하여 21시간 만에 완주를 했습니다. 2011년에는 59일간의 2차 산티아고 길과 영국과 포르투갈 도보여행을, 2012년에는 40일간의 3차 산티아고 길과 바르셀로나 도보여행을 했습니다. 2013년 3월엔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29일 동안 821km를 걸었고, 2013년 10월엔 부산 오륙도 공원에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30일간 780km를 걷기도 했습니다. 도보여행을 시작한 2007년 7월부터 만 7년 동안 제주 올레길 271회를 포함해 약 14,000여 km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 3월엔 유럽 10개국 17개 도시를 36일간 혼자서 배낭여행 했습니다. 14,000여 km라면 서울과 부산을 약 34번 걸은 셈입니다. 정말 많은 거리를 걸은 듯합니다.
문득 ‘걷는다고 돈이 생기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왜 난 매일 죽자 살자 하고 걷는 것일까?’ 자문해 봅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길에 서면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길은 인생과 무척이나 닮은 것 같습니다. 가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지만 길은 어디에도 있습니다. 걷노라면 발끝에서 전해져 오는 말할 수 없는 전율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발끝에 의지한 채 무작정 길을 걷고 있노라면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내 스스로 해결하는 자유스러움이 이토록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길은 내게 있어서 꿈이고 도전이며, 걷다 보면 건강과 행복은 자연스레 덤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새는 날개가 있어 높이 날아야 하고, 동물은 네 다리가 있어 뛰어다녀야 하며, 인간은 두 다리가 있기에 걸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난 죽는 날까지 계속 걸을 것입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