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아름답지도 더 비참하지도 않은 발라동을 그림에서 만날 수는 없을까요?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여기 그녀가 있습니다. 모델도 화가도 모두 그녀입니다. 모델 일을 하며 대가들 어깨 너머로 익힌 솜씨로 발라동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유명한 화가 드가도 인정한 재능으로, 그녀는 자신의 진면목을 그렸습니다. 실제와 빼닮은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그림은 154센티미터였던 그녀의 키를 정확히 알려 주지 않습니다. 커다란 눈망울과 짙은 눈썹이 매력인 그녀의 모습을 확실히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을 헤아릴 기회를 줍니다. 뚫어져라 정면을 바라보는 눈빛이 ‘진짜 나는 누구일까’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만 같습니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나는 때로는 경솔했고, 때로는 어리석었고, 대부분은 열정적이었다.’라고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인정하는 당당함. 그녀의 매력은 여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그는 빨래방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습니다. 빨래방을 찾은 사람들 모두 타인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이웃 대부분은 주말에 빨래방을 찾습니다. 그러니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지요. 문제는 아무도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재빨리 눈치챘습니다. 우울한 도시의 삶이 빨래방 안에도 깃들어 있다는 것을요. 그는 길거리 피아노 프로젝트가 자신의 창의성을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길거리가 이웃끼리 즐겁게 대화하는 특별한 장소가 되기 바랐습니다. 사람들이 연주로 자신을 표현하며 다른 사람과 연결되기를 기대했지요. 제람의 창의적 발상은 서로를 외면하던 도시인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빨래방에서 서로 모른 척했던 버밍햄 시민들은 거리에 부서진 채 방치된 피아노를 발견하고 함께 그것을 수리하고 장식해 연주했습니다.
〈위대한 탄생〉의 자격은 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제일 먼저 은박 포장을 풀고 나와 나머지 경쟁자를 살해한 후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승리는 이런 경쟁 과정을 거쳐 쟁취한 것입니다. 미처 포장을 풀고 나오지 못한 상대방에게 칼을 꽂기도 했고, 두 팔을 뻗어 격렬히 저항하는 경쟁자도 잔인하게 제거했지요. 그런 경쟁 방법이 정당한지 헤아려 볼 겨를은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잠자는 토끼를 모른 척 하고 결승점을 향했던 이야기 속 거북이가 그랬던 것처럼요. 경쟁의 세계에서는 이긴 자가 강한 자가 됩니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갖지요. 〈위대한 탄생〉의 주인공은 원하는 것을 혼자 다 가져도 좋습니다. 그런데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마치고 챙길 것이 딱히 눈에 띄지 않습니다. 승리를 거머쥔 순간, 비로소 그는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 정적의 의미는 무엇일까. 패배를 인정하는 경쟁자가 하나도 없고, 어깨를 두드리며 승리를 축하해 주는 지지자도 하나 없다. 승리는 이렇게 공허한 것일까.’
터너가 예순다섯 살에 완성한 〈노예선〉은 그에게 최악의 시련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림의 금잔디 색 하늘과 석류 빛 바다는 ‘지나친 광기’ 혹은 ‘상식을 벗어난 바보 같은 실험’으로 비판받았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그의 이름 앞에는 ‘영국 최고’ 대신에 ‘정신 나간’, ‘재주는 훌륭하나 그것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과거의 성취를 한순간에 무너뜨린’과 같은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그림으로 고발하려던 한 화가의 진심은, 대영 제국의 명예를 건 언론의 부추김 속에서 왜곡된 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노예선〉이 수없이 많은 그의 그림 중에서 단연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받은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