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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 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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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 곡한다

최용운 | 문이당 | 2001년 10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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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77쪽 | 456g | 153*224*20mm
ISBN13 9788974561697
ISBN10 8974561697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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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최용운
최용운은 1954년에 태어났다.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폐각처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바빌론에 가까이』, 장편소설 『흰 겨울 검은 봄』 『슬프고 아름다운 날들의 노래』『사랑할 시간이 너무 적다』 『그곳엔 까만 목련이 핀다』 『권력과 영광』『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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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재벌이 무한 경쟁 시대라는 복병을 만나 상처 입고 비틀거릴 때, 나는 그들의 몰락이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 혈족 서넛이 실업자가 됐고, 가까운 벗 꽤 여럿이 수십 년 몸 담았던 직장을 잃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 한바탕 요란한 꿈 같은 한국 재벌사를 온전히 그려 보려 했다. 욕심은 그랬으나 경험과 앎이 너무 얇아 애초의 마음먹고 갈았던 날 선 펜은 무뎌지고 호흡은 가빠져, 만족할 만한 함량의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위로라면 소설을 쓰는 동안 사회가 매도하는 재벌의 경영 방식이 재벌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수고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이 발주하는 거 말고 이란에 뭘 갖다 팔면 잘 팔릴까?'
'조사를 시키겠습니다.'
'조사고 뭐고 당신이 이번에 갔다 왔다면서?'
'저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쪽 일이 바빠 바로 들어왔습니다.'
'이 친구야, 그게 장사꾼의 자세야? 출장 간 나라의 시장하고 백화점도 안 가봤단 말이야?'

'출장비 아껴서 정산할 때 몇 푼 내놓거나 물건 사와 직원들 나눠주는 짓거리들 하지 마. 그럴 돈이 있으면 만나는 사람에게 더 써. 식사를 한 끼 대접하더라도 기억될 만하게 내란 말이야. 내 말 알아?'
--- p.201-202
대통령은 불콰해진 얼굴들을 두러보고는 말했다.
"비행기, 그것도 미사일로 무장된 대공포망은 못 벗어나. 결국 잠수함이야."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더니 더는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모두 얼굴이 붉었지만 대통령은 오히려 하얘지는 듯했다.
"김 회장, 그거 사올 돈은 있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각하."
"없으면 얘기하고."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 p. 177
난데없이 내가 회장을 주군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들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재벌 기업의 30년 역사를 봉건제도의 한 변형이라고 감히 단정 짓고 얘기를 시작한다. 변형이란 회장급(그룹 활동을 위해 회장이라는 직급이 주어지지만 그들도 총수의 명령을 받는다)과 사장급이 영지(회사)를 하사받는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운영한다는 것이다. 나라니 애국이니 하는 것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러니 총수는 곧 왕이요 주인인데, 그 둘을 합쳐 주군이라고 한다면 조금 이해가 될지.
--- pp. 9~10
급성장이란 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회사가 좀 빠르게 커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 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은 속도감에 정신이 없다. 갑자기 사람이 늘고 어제까지 부하 직원이었던 사람이 느닷없이 새로 생긴 부서의 장으로 가는가 하면, 서너 달에 한 번씩 더 넓은 사무실로 이전해야 하는 건 보통이다. 무엇보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은 폭주하는 업무량이지만, 묘한 것은 뭘 할까 하는 사이에 그 업무가 끝난다는 것이다.
끝났다는 것은 마무리가 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업무보다 더 중요하고 시각을 다투는 일이 계속 생기는 탓에 예전 업무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몇 개월이 지나면 이전의 업무는 저절로 새로운 업무에 묻혀 버린다. 그래도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 더 생기가 돌고 사람이 늘어나며 현금유동성이 좋아진다면 그게 진짜 급성장이다. 바로 육대주가 그랬다.
--- pp. 62~63
그룹이 건재할 때 회장 비서실에는 모두 12개 부서, 2백여명의 난다 긴다 하는 명문대 출신 직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때는 기획조정실이라는 부서명을 썼는데, 1992년에 청와대로 입성한 위정자가 기획조정실을 비서실로 바꾸라는 웃기는 엄명을 내렸고 기업들은 그것을 따라야 했다. 명칭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일이 중요하지.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말하며 그들의 덜떨어진 간섭을 비웃었었다.
관료들을 비웃던 치기와 거만함은 상대를 만나서 부딪쳐 보고 그들의 실력이 결코 우리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진단 뒤에 나왔다. 그들의 느려 터진 일 처리가 꼼꼼해서가 아니라 체질적으로 굼뜨고 어설퍼서라는 것을 우리는 순식간에 알아 버렸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보다 늘 한 수 위였다. 그들이 기업에 어떤 일을 간섭하려고 하면 우리는 이미 그 일을 덮고 다음 단계로 도망갈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랫가락같이 하나의 추억일 뿐이다. 어쨌건 그들은 건재하고 우리는 거리로, 법정으로 내몰리고 있으니.
--- pp. 20~21
그들이 준비한 차로 3킬로나 되는 독 공사장을 돌았다. 5톤 포클레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은 왼쪽 지하 독 정중앙의 콘크리트를 부수게 했다.
30분 정도 작업을 하자 2미터 가량의 구멍이 생겼다.
"가방을 넣고 시멘트로 밀봉해. 그리고 그 자리를 기분으로 수위 눈금을 그려"
민병찬 이사와 직원들은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 박 대통령이 죽은 것과 이 일을 연관시키는 것 같았다.
--- p.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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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리가 보고 있는 재벌의 초상은 애꾸눈의 반면상 같다. 지난 시대가 눈이 성한 쪽만 그려 온전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면, 이 시대는 눈이 먼 쪽만 그려 장님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요즘으로서는 드물게 정면에서 재벌을 바라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한쪽 눈이 멀게 된 경위까지 밝히고 있다. 세상이 모두 한쪽 눈에 몰려 일면만 바라보며 떠들고 있을 때, 슬며시 다른 쪽으로 가서 세상이 보지 못하는 쪽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이다.
거기다가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재미있다. 우리 재벌을 명령권자가 사라진 혹은 바뀐 명령권자가 전임자의 업무승계를 거부해 버린 뒤에 귀환한 자살특공대에 비유한 것도 그렇지만, 우리 재벌의 성장사를 상징적으로 압축한 듯한 줄거리도 진진함 이상의 감동을 준다. 오랜만에 한 번 잡아 단숨에 읽어 버린 책을 만났다.
--- 이문열(소설가)
국내 재벌 서열 3위의 자리를 지켜 온 육대주(六大洲) 그룹의 비서실 사장이었던 '나'(제갈동)는 25년여 동안 회장을 보좌해 왔다. 그룹이 몰락해 가는 지금, 나는 회장을 옆에서 보좌했던 그 시절을 회고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의 막강한 기업 문화였던 도전 정신은 보신(保身)으로 전락했고 조직은 생명력을 잃었다. 우리와 30년간 공범 관계에 있던 정치인들은 국민의 분노와 이중 심리를 이용하여 우리 그룹을 나라 경제를 망친 범인으로 지목하더니 느닷없이 강력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과거 우리의 경영 방식을 경외로운 시선으로 추켜세우던 학자들과 언론들은 태도를 바꿔 가차없이 우리를 질타했다. 미친 듯이 일하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국민들에게 부채를 떠넘긴 파렴치한 기업인과 그 하수인이라는 낙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몰락은 어딘가 이상하고 억울하며 그 배후가 수상쩍다. 내가 사직서를 내어 회사 분위기를 잡아 보려고 했던 시점은, 국민을 속여 오던 정부가 느닷없이 IMF에 금융 지원을 요청하고 나서였다. 그 후로 해외로 나갔다는 회장과는 연락두절이고 세상은 온통 재벌을 없애고 그들이 경영하던 기업체를 외국에 팔아 치우면 당장에라도 좋은 세상이 올 것처럼 난리였다.

육대주 그룹의 김병수 회장과 나의 첫 만남은, 그가 당시 신문사 경제부 기자였던 나를 느닷없이 찾아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즈음 와이셔츠를 수출해 무섭게 성장하는 육대주물산에 나는 묘한 호기심과 애정을 갖고서 기사를 쓰고 있었고, 김병수 사장은 그러한 나에게 함께 일할 것을 강력히 제안하며 접근해 왔다. 출근 첫날부터 나는 육대주 그룹의 파격적인 업무 처리 방식에 충격을 받았고 곧 그러한 방식들의 이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국내와 세계 곳곳에서 육대주의 명함을 들고 다녔던 숱한 그 인재들은 도떼기시장 식의 기업 문화에 길들여 있었고 한마디로 일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육대주 그룹은 1973년에 시작된 제1차 석유 파동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생각하고 경영다각화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는데 모두가 수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정부도 기업의 다각화가 부를 창출할 수 있고 그 부가 곧 가난을 몰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기업이 팽창하는 것을 적극 도왔다.

입사한 지 2년여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사이 육대주는 열한 개 회사로, 전 직원은 6만 명으로 불어났다. 종합 상사와 건설은 기업 공개를 마쳤고 재계에는 '겁 없는 육대주의 아이들'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정부의 강력한 중화학공업정책 덕분에 재미 한국 과학자들이 귀국해 오면서 그들의 자녀들을 그룹의 일원으로 자연스레 끌어들였다. 정부 주도 각종 방위 산업의 중추를 담당하면서 정보 수집 능력도 겸하게 되어 회사로서는 일석이조의 이득을 얻게 되었다. 중화학공업정책은 박정희 정권의 미래와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그 정책의 성패가, 박정희라는 한 개인이 국민을 가난에서 구했다고 역사에 기록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외교 팀과 함께 수단에 입국했을 때 회장은 천부의 외교적 사업적 수완을 통해 누메이리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을 성사시켰으며, 결국 수단에서의 각종 건설 사업을 개시할 수 있었다. 중형 프로펠러기를 타고 임원들 전원과 해외 출장을 단행하여 시도한 리비아 진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리비아 현장에서 들여온 수십 억 달러는 후에 고스란히 구축함을 만들고 잠수함을 만들게 된 육대주조선에 투자되었다. 시대는 육대주의 편이었다. 그룹은 국내외로 본격적인 경영다각화를 추진하여 복합 기업을 만들었으며 홍보 기능을 강화하였다. 해외 대형 공사 현장이 텔레비전과 신문에 소개되고 외국의 통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회장의 사진이 전파를 타면서 육대주의 이미지는 나날이 향상되어 갔다. 최첨단 신축 사옥으로 이사를 한 후로는 직원들의 사기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신차(新車) 발표를 계기로 사옥 지하의 일식집 '국화(菊花)'에서 대통령과 재미 학자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나는 국가안보회의를 방불케 하는 이야기들을 직접 듣게 된다. 박 대통령은 강력한 자주 국방 의지를 펼치기 위해 핵무기를 비밀리에 제작하고자 한다. 그 후 나와 회장은 5백만 불과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일본을 거쳐 소련으로 건너가 삼엄한 감시 속에 요원들의 도움으로 플루토늄을 구입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회장은 플루토늄을 거제조선소의 독 공사장에 파묻고 훗날을 기약한다.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 각종 제재가 육대주 그룹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제2차 석유 파동 이후 정부가 성장위주정책을 버리고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 조정 작업에 들어갔다. 수출지원금융제도를 대폭 개편하고 부정축재자 색출을 위한 대대적인 작업을 단행했다. 울산 그룹과 육대주 그룹의 총수를 대면시킨 자리에서 국보위는 첫 중공업 투자 조정을 시도하고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린 회장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육대주문화재단을 설립하자는 나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경제적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른 육대주의 살아남기 위한 노력도 육대주의 몰락을 막진 못했다. 육대주의 몰락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으나, 신뢰를 획득하지 못한 것이 실패를 몰고 온 가장 큰 이유이다. 김병수 회장 역시 경영 방식에 있어 적잖은 비판을 받을 만하다. 재벌의 성장도 몰락도 모두가 시대의 산물이요 한바탕 요란하고 긴 꿈에 불과하다. 그러나 거듭 억울한 것은 그 정책 과정에서 공범인 정책입안자들의 과실에 대한 단죄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오로지 기업만이 책임을 졌다는 것이다. 그룹의 몰락에 대한 소문이 여론을 들끓을 때 회장은 회장직을 사퇴한다는 이임사를 발표했다. 그러나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그의 재기의 소문을 나는 변함없이 믿고 있다. 거제의 플루토늄에 대한 마지막 기대도 아직 저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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