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재벌이 무한 경쟁 시대라는 복병을 만나 상처 입고 비틀거릴 때, 나는 그들의 몰락이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 혈족 서넛이 실업자가 됐고, 가까운 벗 꽤 여럿이 수십 년 몸 담았던 직장을 잃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 한바탕 요란한 꿈 같은 한국 재벌사를 온전히 그려 보려 했다. 욕심은 그랬으나 경험과 앎이 너무 얇아 애초의 마음먹고 갈았던 날 선 펜은 무뎌지고 호흡은 가빠져, 만족할 만한 함량의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위로라면 소설을 쓰는 동안 사회가 매도하는 재벌의 경영 방식이 재벌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수고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이 발주하는 거 말고 이란에 뭘 갖다 팔면 잘 팔릴까?'
'조사를 시키겠습니다.'
'조사고 뭐고 당신이 이번에 갔다 왔다면서?'
'저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쪽 일이 바빠 바로 들어왔습니다.'
'이 친구야, 그게 장사꾼의 자세야? 출장 간 나라의 시장하고 백화점도 안 가봤단 말이야?'
'출장비 아껴서 정산할 때 몇 푼 내놓거나 물건 사와 직원들 나눠주는 짓거리들 하지 마. 그럴 돈이 있으면 만나는 사람에게 더 써. 식사를 한 끼 대접하더라도 기억될 만하게 내란 말이야. 내 말 알아?'
--- p.201-202
대통령은 불콰해진 얼굴들을 두러보고는 말했다.
"비행기, 그것도 미사일로 무장된 대공포망은 못 벗어나. 결국 잠수함이야."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더니 더는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모두 얼굴이 붉었지만 대통령은 오히려 하얘지는 듯했다.
"김 회장, 그거 사올 돈은 있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각하."
"없으면 얘기하고."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 p. 177
난데없이 내가 회장을 주군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들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재벌 기업의 30년 역사를 봉건제도의 한 변형이라고 감히 단정 짓고 얘기를 시작한다. 변형이란 회장급(그룹 활동을 위해 회장이라는 직급이 주어지지만 그들도 총수의 명령을 받는다)과 사장급이 영지(회사)를 하사받는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운영한다는 것이다. 나라니 애국이니 하는 것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러니 총수는 곧 왕이요 주인인데, 그 둘을 합쳐 주군이라고 한다면 조금 이해가 될지.
--- pp. 9~10
급성장이란 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회사가 좀 빠르게 커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 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은 속도감에 정신이 없다. 갑자기 사람이 늘고 어제까지 부하 직원이었던 사람이 느닷없이 새로 생긴 부서의 장으로 가는가 하면, 서너 달에 한 번씩 더 넓은 사무실로 이전해야 하는 건 보통이다. 무엇보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은 폭주하는 업무량이지만, 묘한 것은 뭘 할까 하는 사이에 그 업무가 끝난다는 것이다.
끝났다는 것은 마무리가 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업무보다 더 중요하고 시각을 다투는 일이 계속 생기는 탓에 예전 업무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몇 개월이 지나면 이전의 업무는 저절로 새로운 업무에 묻혀 버린다. 그래도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 더 생기가 돌고 사람이 늘어나며 현금유동성이 좋아진다면 그게 진짜 급성장이다. 바로 육대주가 그랬다.
--- pp. 62~63
그룹이 건재할 때 회장 비서실에는 모두 12개 부서, 2백여명의 난다 긴다 하는 명문대 출신 직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때는 기획조정실이라는 부서명을 썼는데, 1992년에 청와대로 입성한 위정자가 기획조정실을 비서실로 바꾸라는 웃기는 엄명을 내렸고 기업들은 그것을 따라야 했다. 명칭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일이 중요하지.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말하며 그들의 덜떨어진 간섭을 비웃었었다.
관료들을 비웃던 치기와 거만함은 상대를 만나서 부딪쳐 보고 그들의 실력이 결코 우리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진단 뒤에 나왔다. 그들의 느려 터진 일 처리가 꼼꼼해서가 아니라 체질적으로 굼뜨고 어설퍼서라는 것을 우리는 순식간에 알아 버렸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보다 늘 한 수 위였다. 그들이 기업에 어떤 일을 간섭하려고 하면 우리는 이미 그 일을 덮고 다음 단계로 도망갈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랫가락같이 하나의 추억일 뿐이다. 어쨌건 그들은 건재하고 우리는 거리로, 법정으로 내몰리고 있으니.
--- pp. 20~21
그들이 준비한 차로 3킬로나 되는 독 공사장을 돌았다. 5톤 포클레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은 왼쪽 지하 독 정중앙의 콘크리트를 부수게 했다.
30분 정도 작업을 하자 2미터 가량의 구멍이 생겼다.
"가방을 넣고 시멘트로 밀봉해. 그리고 그 자리를 기분으로 수위 눈금을 그려"
민병찬 이사와 직원들은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 박 대통령이 죽은 것과 이 일을 연관시키는 것 같았다.
--- p.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