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 : 나는 오늘의 이 21세기가 참 재미없다고 느낀다. 청년기를 보냈던 지난 20세기는 광분의 시대였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라는 제목이 그래서 나왔다. 광분의 20세기적 감흥을 떠올리며 그 음악에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라고. 또한 여러 면에서 돌아버릴 것 같은 21세기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라고. 이 상반된 미침의 양다리를 공감할 사람이 많으리라 믿는다. 미치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세상 벗들에게 다시 또 말을 건넨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P.64 : 남녀 감정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연애 못지않은 흥분과 떨림의 밤샘이 많다. 1965년 카네기홀 실황으로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부조니 편곡의 바흐곡 「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BWV 564)」3악장이 한 사례다. 한 손은 강하고 힘차게, 다른 손은 숨은 듯 연약한 터치로 밀당을 벌이다가 마침내 몸을 섞듯 후련한 합체로 달려가는 5분간이 꿈결 같다. 지겨운 생에서 이런 특별한 악흥의 순간이 사랑에 필적하는 것 아닐까.
여기 살벌한 현대음악을 즐기는 사내가 있다. 그는 애써 고립을 취하여 마포구 어느 고기집 아래 지하층 공간에 틀어박혀 산다. 하지만 그 아득한 지하 공간에서도 시국이며 남북 관계, 자본주의 위기와 중산층 붕괴 문제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고급한 커피문화를 향유하면서 멋진 연애에 대한 선망도 떨치지 못하건만 생체실험에 몸을 팔아야 하는 가련한 하급병사의 음악 스토리에 또한 이끌린다. 위선이거나 위악이거나.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하다. 19세기를 사는지 21세기를 살고 있는지, 정말로 고립돼 있는지 온 세상에 촉수를 뻗고 있는지. 왜 사는지. 정말로 왜 사는지. 음악도 그렇게 무지와 미지로 존재한다. 한 떨기 꽃이 피어난 이유를 설명하지 않듯이,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했듯이 닥치고 음악이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