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소장하고 있는 경성방송국 개국 당시의 한 사료를 보면, JODK는 라디오방송의 3대 사명으로 보도(報導), 교화(敎化), 위안(慰安) 등을 내걸었다. 보도 장르에는 내외·선내鮮內 뉴스, 천기예보(기상통보), 시장가격, 경제시황 등이, 교화에는 명사 강연, 각종 강좌, 초등학습 강좌, 어린이 시간 등이, 위안에는 서양 음악, 조선 음악, 연극, 기타 내선(內鮮)의 각종 오락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경성방송은 개국 초기, 일본과 마찬가지로 편성 방침이 확고하게 서 있지 않아 확립된 프로그램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 당시 조선 총독의 문화정치 표방으로 ‘조선에 있어서 문화의 향상 발전에 공헌’한다는 이상적(理想的) 방침은 갖고 있었으나, 실제로 프로그램을 구체화하는 데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 p.23~24
한국인 위주의 뉴스 취재 및 방송뿐만 아니라 한국인 기자가 전무하던 불모지에 한국어 방송의 뉴스가 편성되었으니 뉴스를 생산할 보도시스템이 급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통신을 아우르는 뉴스 편집자, 뉴스를 취재하는 기자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체제를 주도적으로 구축한 이가 그 당시 서울중앙방송국장 이혜구(李惠求)였다. 그의 지시에 따라 문제안(文濟安)이라는 최초의 방송기자가 탄생하고 최초의 편집실무책임자인 이덕근(李德根)이 출현하였다. 후임으로는 전제옥(全濟玉), 강준원(姜駿遠), 조한긍(趙漢兢) 등이 보인다. 같은 시대 기자로는 문제안과 쌍벽을 이루었던 조동훈(趙東勳)이 있다.
--- p.52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영방송 관장 부처인 공보처 방송국(KBS)에서는 공채시험을 거쳐 방송기자를 여러 명 선발했다. 그 해 10월에 입사한 이들이 김인현(金仁鉉), 최재요(崔在曜), 권중희(權重熙), 허덕호(許德鎬), 김광국(金光國), 편용호(片鎔浩), 김우용(金禹鎔), 신기철(申基徹) 등이다.
--- p.60
방송계의 가장 큰 변화는 민간 상업방송의 대거 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국영방송 체제의 경직된 단일방송 환경에서 광고를 경영 기반으로 한 상업방송이 3개씩이나 탄생해 일시에 일국영(一國營) 다민영(多民營) 체제의 방송국가가 되었다. 1961년 12월 서울 문화방송(MBC)의 개국 및 그에 뒤따른 지역방송사의 출현과 함께 1963년 동아일보사가 신문과 방송 겸영 체제로 동아방송국(DBS)을 개국시켰다. 곧바로 그 다음 해 대재벌인 삼성그룹이 방송사 경영에 뛰어들어 동양방송을 창설하였으며, 동양방송은 일시에 AM·TV·FM 매체를 관장하는 미디어그룹으로 급부상하였다. 이러한 방송매체의 급격한 팽창에 뒤늦게나마 KBS도 변신을 시도하였다. 1968년 국영 방송 KBS가 3개 방송국을 ‘중앙방송국’으로 통합 출범하고 관료 사회에서 보기 드문 ‘부部’ 체제로 개편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문화방송이 뒤늦게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하면서 지금과 같은 TV 3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 p.83~84
1940년대 말엽과 50년대를 통틀어 한국에서의 방송은 유일하게 국영방송 KBS뿐이었다. 따라서 방송기자나 뉴스 프로그램도 KBS맨 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이 6·25전쟁으로 1950년대가 송두리째 망가진 데다, 후진국 공무원인 방송기자의 영역 또한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방송의 사명은 배고프고 불안한 국민들에게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보도 영역을 지키고 확대해 나간 이들 가운데 조한긍과 김인현, 그리고 한영섭 등을 기록하려고 한다.
조한긍은 이덕근 등의 뒤를 이어 편집기자로 데스크 역할을 한 공무원 시대의 기자이자 관료이다. 김인현은 1940년대 말 정부수립 초기에 방송기자로 입문하여 KBS에서 보도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서울지역에서 최초로 개국한 상업방송인 문화방송에 스카우트되어 보도과장, 보도국장 등을 거치면서 민간방송보도의 기틀을 다진 방송 기자였다. 또한 한영섭은 방송기자로서 처음 종군기자로 활동했으며 1, 2공화국의 과도기에 KBS 보도의 중립성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했던 방송인이었다.
--- p.188~189
한영섭은 1949년 8월 국방부 출입기자로 발탁되었는데, 이는 선배 기자가 서울신문사로 이적하면서 갑자기 출입처가 비자 배정된 것이 다. 그 당시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국방부의 전신인 통위부 시절부터 출입한 이로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종군기자 훈련을 받은 이들까지 소위 ‘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다 신문사 통신사 소속의 방낙영, 박성환, 임학수 등 민족지로 주가를 높이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 기자들인 데다 군사훈련도 받은 상황이었다. 그는 이러한 경력이나 연륜이 많은 선배 기자들 틈바구니에서 1950년 2월 육군사관학교에서 병사들로부터 실전에 가까운 군사훈련을 2주 동안 철저히 받았다.
한영섭은 군사훈련을 마친 지 채 넉 달도 안 돼 6월 전쟁을 맞으며 본격적으로 종군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 p.20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