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 야스마로는 나라 시대 문관이다. 704년 종오위하에 임명되고 711년 정오위상에 임명된다. 이해 겐메이천황에게 사서를 편찬하라는 명을 받고 다음 해인 712년 정월, ≪고사기≫를 헌상한다. 같은 해 종사위하에 임명되고 다음 해에는 씨족장이 된다. 일설에 따르면 ≪일본서기≫ 편찬에도 가담했다고 한다. 사망 시 관위는 종사위하 훈오등민부경(내무장관 격)이다. 근래 나라시 고노세마을 차밭에서 묘지가 발견되어 출토됨으로써 ≪고사기≫의 편자가 오노 야스마로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설도 있고, 그런데도 이 편자 이름이 적혀 있는 고사기 서문은 위작이라는 설도 있다. 여전히 이론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역자 : 강용자
일본 국학원 대학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엽집≫을 텍스트로 해 한일 간 고대 문화의 관계를 전공했으며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부경대학교, 경남대학교, 부산외국어대학교, 해양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서대학교, 창원대학교, 동의대학교에 출강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 지난번과 같이 기둥을 돌고는 이번에는 이자나기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대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성인가?” 이에 이자나미도 말했다. “당신은 정말 멋진 남성이에요.” 이 같은 말을 주고받은 뒤 다시 결합하여 태어난 아이는 아와지 섬(淡路島)이다. ---p.28
어느 날 닌토쿠천황(仁德天皇)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 사방 국토를 보며 말했다. “식사를 준비하는 연기가 전혀 보이지 않다는 것은 백성이 모두 가난하다는 것일 테다. 그러니 지금부터 3년간, 백성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토록 해라!” 이 때문에 궁전은 파손되고 곳곳에서 비가 새기 시작했으나 천황은 전혀 수리하지 않고 그릇으로 새는 빗물을 받으며 비가 새지 않는 장소로 피해 다녔다. 그 후 어느 날, 국토를 내려다보니 마을에 밥하는 연기가 곳곳에서 나고 있었다. 이것으로 백성이 부유하게 된 것을 알고 지금이야말로 세와 부역을 받아도 된다고 하여 부과시켰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세금이나 부역으로 고통 받는 일은 없었다. 이런 까닭에 이 시대를 칭송하여 성제(聖帝)의 치세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