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우리의 기도가 영계에 미치는 효과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요한계시록을 읽던 나는 다음 구절들이 페이지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계 8:4-5).
기도할 때마다 천국의 기도 대접이 채워진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에 하나님의 불(능력)과 섞이고 땅으로 되돌아와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기도는 천장에 부딪쳐 맥없이 떨어지지 않는다. 향처럼 피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간다.
기도할 때 자연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도, 영계에서는 기도 대접이 채워지고 있다. 그 대접이 가득 차면 기울어져서 기도의 응답을 쏟아 부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대를 향해 기도 대접을 기울이실 준비가 되셨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셋 가운데 한 태아가 낙태를 당한다. 이 세대가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사탄이 그토록 애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이 세대를 향해 뭔가 특별한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탄이 막으려 했던 첫 번째 세대는 모세의 세대였다. 바로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세의 세대는 구원이 나타나는 세대였다.
사탄이 제거하려 했던 두 번째 세대는 예수님의 세대였다. 헤롯 왕은 이번에도 두 살 아래 모든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세대에서도 구원이 나타났다.
이제 사탄은 세 번째 세대, 곧 우리 세대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낙태를 통해 이 세대에 많은 공격이 가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구원을 경험할 또 다른 세대가 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을 겪더라도, 하늘의 대접이 기울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얼마 전, 한 소형 비행기 조종사에 관한 실화를 읽었다. 그는 비행 중에 비행기 문이 열렸다는 경고등을 보고 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가 문 앞에 도착한 순간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고 그는 그대로 비행기 바깥으로 빨려나갔다.
부조종사가 관제탑으로 무선을 보냈다. “회항합니다. 조종사님이 방금 비행기 바깥으로 추락했습니다. 시신을 찾을 구조헬기를 보내 주십시오.” 그런데 부조종사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조종사가 빨려 나갔을 때, 긴급 사다리가 함께 펼쳐졌고 조종사는 사력을 다해 그것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15분 후, 부조종사는 비행기를 착륙시키기 위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는 조종사의 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고작 8센티미터 위에 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멍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상황을 깨닫고 조종사를 돕기 위해 활주로로 달려 나갔다. 그들은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야 했다.
그런 모습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오래 참음! 끝까지 버티는 힘! 능력 있는 기도는 기도의 대접을 채울 때까지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기도와 분별력은 함께 움직인다. 하나님은 이 둘의 간격을 메우고 효력 있는 기도의 용사가 될 사람들을 찾으신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교회를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어떤 남자가 “마게도냐로 오라”고 말하는 환상을 보았다. 바울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없었고 강가에서 기도하는 여인들의 무리를 보았다(행 16:13 참조). 이 여인들의 기도 때문에 바울은 마게도냐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여인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서쪽 대신 동쪽, 즉 아시아로 향했을 것이다.
기도와 분별력, 섬김은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이다. 지구상에서 벌어진 모든 주요 부흥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었다.
--- 3부. 분별의 문을 여는 3가지 열쇠 중에서
누가복음 2장에는 마리아와 요셉과 그들의 열두 살 난 아들 예수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 기간 동안 온갖 종교적인 활동들이 있었다. 성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을 떠났다.
하룻길을 간 후, 그들은 일행 가운데 예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와 요셉은 주위 친척들 모두에게 예수의 행방을 물었지만 어디에서도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 사건에는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 성대한 신앙의 축제를 마치자마자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함께 종교적 의무를 다한 신앙심 깊은 친지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놓쳤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리더라도 한 가지만은 명심했으면 좋겠다. 예수의 영의 인격적인 임재를 놓치지 않도록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절대 그분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성전에 있지 않을 때 자문해 보라. ‘나는 예수님의 인격적 임재 안에 있는가? 그분과 교제하고 있으며 그분을 집에 모셔 왔는가?’
마리아와 요셉은 성전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예수님은 교회에서만 우리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가정으로, 우리의 일상생활로 초대하기를 원하신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예수님의 인격적 임재를 잃어버리지 마라. 예수님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가장 없어 보이는 사람은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이다. 마리아처럼 그분을 사랑하고 이해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예수님의 최측근이었다. 그런데도 그분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웠는가! 두 사람의 삶은 한데 얽혀 있었다. 그분은 마리아의 일부였고, 마리아는 그분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예수님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그분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성경은 그녀가 아이 예수가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눅 2:44)였다고 말한다. 그녀는 예수님이 무리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위험이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사업을 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장부를 꼼꼼히 살피고 대차대조표를 맞춘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넘어가면, 그분이 우리 중에 계시겠거니 하며 느긋해진다.
마리아와 요셉이 그리스도를 잃어버렸을 때 신앙심 좋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주목하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늘 함께 있을 법한 사람이었지만 그분을 잃어버렸고, 그러고도 그 사실을 몰랐으며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어디였는가? 극장이나 카지노나 클럽이 아니었다. 거룩한 것들이 가득한 거룩한 환경, 성전에서 잃어버렸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 없이 3일을 살았다. 그들이 마침내 예수님을 찾은 곳은 그분을 잃어버렸던 바로 그 장소, 성전 안이었다. 그들은 아들을 나무랐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두고 떠났던 그 장소, 바로 아버지의 집에 있었다고 대답했다.
탕자가 아버지를 찾은 곳은 어디였는가? 아버지를 두고 떠났던 바로 그곳이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곳에서 그분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그곳에 돌아가기만 하면, 그분은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 “내가 그들의 변절을 용서하고 내가 그들을 기꺼이 사랑할 것이다”(호 14:4, 우리말성경).
--- 4부. 분별의 능력을 누리는 삶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