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가르치는 일의 막중함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풀꽃처럼 여럿 속에 묻혀 그 작은 꽃얼굴을 숨기는 아이들, 한 명 한 명 모두 다 당당하고 고운 저 아이들을 제대로 보아 주겠노라는 다짐으로 나는 ‘풀꽃선생’이다. 1989년 강원도 삼척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서울 경희중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은 어마어마한 욕심을 꼭 이루고 싶다. 함께 쓴 책으로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이 있다.
깁스를 푼 아이와 축하의 악수를 하기 무섭게 새로운 환자가 생기는 상황이 계속되니 그냥 있어선 안 되겠다 싶었다. “얘들아, 안 되겠다. 이 교실 터줏대감이 너희에게 뭔가 언짢으신 게 있나 보다. 고사를 지내자.” (……) 돼지머리는 비씨서 못 사고 “얼굴 뚱그런 네가 대신 목만 내밀어라”는 둥 애들끼리 서로 장난치며 놀리다 결국 두꺼운 도화지에 웃는 돼지 얼굴을 그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 고사는 일종의 학급 잔치였다. (……) 재미도 있으면서 교육적 의미도 있는 행사였다. 만약 어딘가에 조상신이나 정령들이 정말 계신다면 그 힘을 빌려서라도 아이들의 거친 행동과 부상을 막아 보고 싶기도 했다. _ 《여섯 명의 깁스맨과 대구포》, 31~32쪽
“오늘 아침에 어떤 선생님이 친절하게도 작년에 여러분이 어떤 학생이었는지 말해 주려는 것을 정중히 거절했다. 난 여러분을 전혀 모른다. 여러분도 나를 잘 모를 것이다. 오가며 우리 학교 선생님인 줄이나 알았을 것이다. 우리 서로 모르고 시작하자. 난 여러분이 작년에 전교 1등을 했어도 관심 없다. 일진으로 학생부에 끌려다녔어도 난 모른다. 지금 우린 서로에 대해 백지상태다. 여러분은 그냥, 새로 나의 반이 된 소중한 나의 학생일 뿐이다. 혹 1ㆍ학년 때 열심히 살지 않았더라도 다 잊어라. 난 모르니까. 여러분에게는 새 담임에게 좋은 모습을 보일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여러분도 나를 잘 모르니 나도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서로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_ 《졸업식에 우는 아이》, 41~42쪽
짝사랑하던 선생님에게 용기를 내어 애정을 표현하던 소년들이 사춘기를 보내고 졸업을 하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청년이 되어 찾아온다. 어쩌면 자신의 소년기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기 위해, 모천에 회귀하는 연어처럼 안녕을 고해야 하는 사춘기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찾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열여섯 소년이 연모하던 바로 그 사람인가 찬찬히 뜯어본다. 그러다 되레 그 시절 부끄러운 ‘소년’을 발견하게 되면, 청년들은 얼굴을 붉히고 돌아선다. 자신의 사춘기에 ‘영영 안녕’을 고하고 다시는 나를 찾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치기 어린 마음은 사라지고 청년이 된 자신을 발견한 소년들은 그 시절 따스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조금씩 늙기 시작하는 스승을 두고두고 계속 만나러 온다. (……) “선생님,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죠?” “짜식, 아직도 사춘기냐. 사랑 타령이게?” “그럼요, 전 영원히 사춘기예요.” _ 《사춘기 소년의 사랑》, 80~81쪽
소설을 구상하다가 비장하게 “왜 여자가 영웅인 고전소설은 없는 겁니까!”라고 비분강개한 녀석도 있었다. 내가 “박씨전!” 하고 한마디로 대답해 주자 아름다웠던 그 비분강개는 사라지고 녀석의 무식만 남았다. 사실 나는 이렇게 의문을 던지는 아이들이 좋다. 자신의 무식이 드러날까 봐 조심스러워하지 않고 내게 질문하는 아이들이 좋다. 가끔 정말 황당한 질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운문이 시예요” 이런 건 애교로 넘길 수 있다. “훈민정음이 한글이에요?”라거나 “우리나라가 언제 해방됐나요?”라고 물을 땐 정말 꿀밤을 한 대 선물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녀석들의 그 천진한 표정, ‘샘은 우리가 무식해도 얼마든지 이해해 주실 거죠? 저희는 샘의 사랑을 믿어요~’ 하는 표정을 보면서 목구멍까지 나왔던 욕을 도로 삼킨다. “야, 이 무식한 쉐리야~!” 하고 말해 질문한 한 아이를 무안하게 만들고 나머지 서른여섯을 웃게 만드는 실수는 결코 저지르지 않는다. 난, 친절한 ‘안 샘’이니까. _ 《현대판 고전소설 쓰랬더니 뭐? ‘해물파전!’》, 197~198쪽
가끔 ‘왜 대안학교를 꿈꾸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이는 ‘학교가 죽어야 교육이 산다’는 일리치의 오래된 담론을 새삼 들먹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나…… 학교에 한번 와 보라. 먼지투성이 좁은 책걸상에 앉아 있는 저 아이들은 왜, 유학도 가지 않고 대안학교로 가지도 않고 홈스쿨링도 검정고시도 택하지 않고 저기 앉아 있는가. 학교가 죽어야 한다면 저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저기 앉아 있는 아이들 중에는 ‘원수 같은’ 사교육조차 받을 수 없는 아이들도 많다. 아니 어쩌면 엉덩이가 터지게 매를 맞을지라도, 소매가 반들거릴 만큼 새까맣게 때가 앉은 교복을 입고서라도 ‘학교에는’ 나오는 그들에게 학교는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