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신화》는 원말명초의 학자. 그는 자를 종길(宗吉), 호를 존재(存齋)라 한다.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지금의 항주) 출신으로 학식도 풍부하고 문필에도 능해 14세 때에 이미 문명을 사방에 떨쳐 당시 대문장가였던 양유정의 인정을 받았다. 청장년기인 홍무 연간(洪武年間, 1368∼1398)에 인화ㆍ임안ㆍ의양 등지의 훈도로 있다가 노년기인 영락(永樂, 1403∼1424) 때에 주왕부의 우장사를 지냈으나, 61세[영락 6년(永樂六年), 1408]에는 견책을 당해 섬서성 보안으로 귀양을 간다.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78세[흥희 초년(洪熙初年), 1425]에 비로소 영국공 장보의 주청으로 석방되어 원직에 복직했고 한때 내각판사로 있었다. 그리하여 3년 동안 영국공가의 숙사 생활을 하면서 예우를 받다가 81세[선덕 3년(宣德三年), 1428]에 고향으로 돌아가 86세[선덕 8년(宣德八年), 1433]에 생을 마감한다. 저작으로는 《전등신화》 외에도 《귀전시화》, 《존재시집》, 《악부유언》, 《춘추귀주》, 《여청곡》 등이 있었다고 중교 서문에 전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가 최근 그중에서 《악부유언》이 중국 남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그의 많은 작품들이 후대에 들어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그의 시가 《열조시집》, 《명시기사》 등에 실려 있다.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거쳐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 전공으로 문학석사 및 문학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2000년부터 버클리 대학교(U. C. Berkeley) 동아시아 연구소(Institute of East Asia Studies)에서 1년간 객원교수(Visiting Scholar)를 지냈다. 현재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 《후탄선생정정주해 서상기》(국학자료원, 2006), 《봉성에서》(국학자료원, 2001), 《고금소총 명엽지해》(국학자료원, 1998), 《국역 소문쇄록》(국학자료원, 1997)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