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키드의 20세기 영화』에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의 역사를 담은 문학작품, 그리고 그러한 문학에서 영화로 옮아간 작품들을 중심으로 각 대륙의 시대극을 둘러본 '문학과 역사'를 마무리지으면서, 마지막으로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을 살펴보고 싶은 이유는 그것이 우리 영상예술이 거쳐온 대단히 의미심장한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선언적인 작품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동철은 그가 사귀게 된 여대생을 친구와 함께 납치할 계획을 세우지만, 알고 보니 혜영은 가짜 여대생 노릇을 하는 창녀이다. 그들 세 사람은 창녀촌과 해수욕장을 거치며 사랑도 하고, 혜영은 손님이 강요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죽는다는 대충 줄거리인데, 이 영화에서는 얘기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각본은 윤시몬이 썼다고 하지만, 사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사진 검열을 받아야 했던 '모범적인 각본'은 실제로 촬영이 시작한 다음부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제목도 십여 개를 만들어 검열 담당자들에게 제출했고, 그 가운데 당국자들이 '바보선언'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첫 촬영을 위해 촬영기를 들고 이화여자대학교 앞으로 나갔을 때는 무슨 장면을 찍어야 할지도 몰랐고, 육교 밑에서 여자들의 치마 속을 훔쳐보는 장면도 무작정 찍어놓았고, 편집한 영화는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이장호가 건물에서 뛰어내려 죽어 버리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작품이 완성된 다음에는 검열 과정에서 소설가 박완서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서 한 장면도 잘려나가지 않았지만, 이장호 감독은 주무부서로 불려들어가 스스로 한 장면만 잘라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문제의 장면은 입대 전야에 부르는 노래의 가사에서 "영자가 어쩌고 순자가 어쩌고" 하는 대목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의 부인 이름과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이장호 감독은 '순자'의 녹음띠에서 'ㅅ'만 잘라내 '운자'라는 이름으로 바꿔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