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사라지고, 잊혀진 과거의 사람들. 과거는 현재에 존재하면서도 자꾸 멀어진다. 과거는 없어지지도 않고 그대로도 아니며,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과거는 망각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되돌아가 다시 옛날을 살기 또한 불가능하고, 버린 것을 되찾아 봐도 지금은 모습이 달라졌다. 나 또한 기나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다른 사람이 되었고, 현실 속에서는 과거가 무엇인지 엄청나게 달라졌을 텐데― 달라진 그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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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죽여 없애는 폭력이다. 살인은 미덕이 아니겠지만, 전쟁 자체가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인간적인 행위를 기대하지 말아야 하며, 나를 죽이려는 적은 일단 먼저 죽여야 한다는 공식이 전쟁의 원칙이기 때문에, 아군의 살인만 비판하고 적의 살인은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일방적 위선이라고 한기주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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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다르게 살아가면서도 똑같은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수십억의 인간. 아무리 저마다 달라도 모두가 똑같은 사람들. 아무리 다르게 살아보려고 해도 모두가 똑같아지는 인생에서는 반복되는 순간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영원한 순간이 된다. 평범한 나날들이 무수하게 반복되며 이어져서 하나의 영원한 역사를 이루고, 그 시간 속에서 무수히 복제된 유령들로 가득한 세상.
모든 사람이 같아 보이면서도 다르고, 똑같아 보이는 검정 파자마 차림의 주민과 베트콩이 뒤섞여 살고, 같은 사람의 성분이 상황과 시간에 따라 바뀌고는 하던 나라 ― 그것은 베트남의 특성이요 속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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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대형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온갖 무기는 값비싼 상품으로 생산되었다. 생산품은 다량으로 소비해야 산업이 활성화하고, 사람들과 집단들은 그래서 최첨단 무기를 만들면 그것을 사용하고 실험할 대상이 필요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얻는 이득이 경제 성장 말고도 실전 체험과 무기 현대화라고 파병 당시에 당당하게 정부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전쟁 산업과 상품은 전투력이나 마찬가지로 실전에서 성능과 잠재력을 증명하고 기능을 보완해야 발전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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