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네가 없는 이 세상은 안개무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바쁘면 환절기에 만나자』, 『사랑은 기다림으로부터의 시작입니다』, 『수화기를 들면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등을 출간했으며 수필집 『느낌 하나 사랑 둘』, 『사랑』 외에 장편소설 『프리섹스』, 『칠공주1,2,3』, 『하늘의 아들 1,2』, 『슬픈고백 1,2』 등을 썼다.
루체비스타는 말끝을 흐렸다. 나 역시 더는 루체비스타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축배를 든 후에 우린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았다. “이 밤이 지나면 떠나겠지?” “바람이니까.” “바람은 왜 머물지 않는 걸까?” “바람이 머물면 시간도 멈출 거야.” “루체비스타,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 난 욕심이 많아. 당신을 보내주지 않을지도 몰라.” “바람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거야. 바보야.” 이 밤이 지나지 않기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루체비스타가 옆에 누워 있기를, 욕심을 조금 더 부려 이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는 눈을 멀뚱거렸다. 잠들기 싫은 밤이었다. 내게는 축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체비스타가 있는 한 축제는 계속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밤이 깊어 갈수록 나는 시간의 노예가 되어 갔다. 부스스 눈을 뜬 늦은 아침. 루체비스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서둘러 폴라로이드 사진을 찾았다. 옷장에 가지런히 걸려 있던 외투 주머니에서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남과는 달리 폴라로이드 사진에 루체비스타의 흔적은 없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루체비스타뿐, 만남의 기약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또 바람이 되어 내 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녀의 빈자리로 공황이 찾아 들어왔다. 나는 입에 약을 털어 넣고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숙취 때문에 공황이 더 심해진 것이다. 축제 끝에는 쑥대밭이 되어버린 공허만 남을 뿐이다. 난 축제의 끝이 싫다. 그래서 항상 축제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이제 내게는 아무도 없다.
장하진은 몇 년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나름의 여유로운 생활 속의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요업을 하던 아버지로부터 자운요를 물려받은 후 도자기 수업을 열고, 홈페이지로 도자기 매매도 하며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다. 스포츠 센터의 아줌마들과 수영을 하며, 간간이 친구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에도 꼬박꼬박 참석하는 그에게 남은 불행은 사랑하는 여인이 떠났다는 것. 오랜 연인이었던 최지은은 그와 보낸 몇 년의 세월을 포기하고 다른 남자를 찾아 행복의 축제를 열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청계천 모전교에 앉아 혼자 맥주를 들이키던 그의 옆에 또 다른 여인이 자리를 메우며 아무 말 없이 맥주를 건네받는다. 연인, 가족들과 함께 행복의 빛을 가슴에 담고 청계천의 아름다운 루체비스타 거리를 걷는 사람들 사이에 있던 외로운 그들에게도 역시 작은 루체비스타의 빛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모텔에서 찍은 작은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 담아둔 채 끊어지고 만다. 그러나 다음 크리스마스이브를 고대하며 지금까지의 살아오면서 겪은 그 어떤 환희의 순간보다도 더 새로운 축제의 순간이 시작될 것임을 그는 직감으로 눈치 채고 있는데……. 장하진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공황은 어느 새 그녀의 옆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의 알람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