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연인, the lovers》를 시작으로 《혁명의 여신들》 《암살로 읽는 한국사》 《조선백성실록》 《조선의 명탐정들》 등의 역사서를 집필했다. 2011년 2년간의 기획과 집필 끝에 조선 시대 전쟁사를 중계방송 방식으로 풀어낸 《조선전쟁 생중계》를 출간했다. 2013년 《기억, 직지》로 제1회 직지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멍한 눈으로 행렬을 바라보던 해산은 또래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색 배자에 가는 주름이 잡힌 옥색 치마 차림이었다. 한 가닥으로 땋은 머리를 뒤로 넘겼는데 얼굴은 눈처럼 하얀색이었고, 볼은 텃밭에서 자라는 복숭아 빛깔이었다. 해산이 입을 벌린 채 여자아이가 털컹거리는 수레를 따라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해산은 낯선 남자가 이끄는 행렬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p.18
“그럼 저는 어른이 되기 힘들겠네요?” 낙담한 해산의 말에 설유가 정원 한구석에 핀 대나무를 가리켰다. “대나무는 말이다. 어떤 때는 한 치도 자라지 않다가 어떤 때는 한 뼘이 자라기도 한단다. 고민이 많다는 얘기는 잘 클 수 있다는 뜻도 되지.” 해산이 잠자코 듣는 것을 본 설유가 덧붙였다. “물론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어른이 될 수 없단다.” “그럼요?” “행동도 해야지.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는 게 바로 어른이란다.”--- p.57
옆에 있던 야스꼬의 말에 요시무라가 버럭 화를 냈다.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아느냐? 화약을 손에 넣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고려, 아니 조선에 굽실거려야 한단 말이다.” “그냥 교역해도 되잖아요.” “야스꼬, 저놈들이 우릴 사람 얼굴을 한 짐승 취급하는 걸 잊었느냐? 교역을 하더라도 우리가 힘이 있어야 저들이 깔보지 않는 법이란다. 조선이 새로 들어섰으니 힘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우리 쓰시마를 공격할 게 뻔하다. 며칠 동안 조선 사람 노릇하더니 진짜 조선인이 된 거냐?” 요시무라의 말에 충격을 받은 야스꼬가 고개를 돌렸다.--- p.129
해산은 동굴에 남은 어머니와 이진유,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요시무라, 아니 설유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른은 단순히 나이를 먹고 키가 큰다고 되는 게 아니다.” 뒤이어 설린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알아야 되는 거 아닐까?” 엄습해 오는 오한으로 온몸이 떨렸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겨우 움직여 앞으로 나가던 해산은 낙엽더미를 밟고 비틀거렸다. 겨우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는 데 성공한 해산은 눈앞에 펼쳐진 싸리나무 숲을 발견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아버지의 환영을 봤다. 놀란 해산은 눈을 껌뻑거렸다. “아, 아버지.”--- pp.139~140
“어차피 이러다 조선군이 나타나면 끝입니다. 명령만 내려 주시면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기다려 봐야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요시무라가 고민하는 사이 참지 못한 부하 한 명이 창을 휘두르면서 동굴로 뛰어갔다. 그러다 날아온 주화가 오른쪽 정강이에 박히고 말았다. 얼른 달려가서 부하의 정강이에 박힌 주화를 뽑아낸 타테시가 요시무라에게 다가왔다. “보십시오. 쇠촉이 아니라 나무 끝을 깎은 겁니다. 거기다 화살 깃도 아교를 붙인 게 아니라 그냥 홈을 파서 끼운 겁니다.” “속았다. 당장 공격해!” 요시무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동굴을 향해 뛰어갔다.--- p.153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고 촌장이 나왔다. 촌장은 댓돌에 놓인 미투리를 신으면서 방에 대고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아세요. 그게 우리 마을을 위하는 길입니다.” 마당으로 나온 촌장은 해산을 보더니 주춤했다. 그러고는 상기된 표정으로 지나쳐 갔다. 촌장을 따라온 어른들까지 모두 밖으로 나간 다음에 해산은 방으로 들어갔다. 등잔불을 앞에 둔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웠다. “뭐래요?” “그게 말이다.” 머뭇거리던 어머니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여기를 떠나란다.”--- p.169
대장군전의 위력을 확인한 해산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세워져 있던 화차로 걸어갔다. 비스듬하게 세워진 수레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작은 총통 수십 개가 올려져 있었고, 총통마다 철령전이 꽂혀 있었다. 병사들이 백 보쯤 떨어진 곳에 투구와 갑옷을 입은 허수아비 수십 개를 옹기종기 세워 놨다. 대충 거리를 가늠하던 해산이 월대를 쳐다봤다. 두 번째로 붉은 깃발이 올라가자 해산은 손에 든 횃불을 심지에 붙였다. 수십 가닥이 꼬여 있던 심지가 타들어 가는 것을 본 해산이 물러나자 병조판서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에도 귀를 막아야 하느냐?” “괜찮습니다.” 해산이 고개를 저었지만 병조판서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화약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철령전들이 하나 둘씩 총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포성 대신 귀를 찢어 버릴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날아간 철령전들이 백보 앞에 세워진 허수아비를 덮쳤다.
이 소설에는 역사의 빈틈에 스며들어 이야기를 체험하는 즐거움이 있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더라도 ‘또래’의 아이들이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지 함께 호흡하며 체득할 수 있다면 청소년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화약 비법서를 빼앗으려는 일본인 스승과 그것을 지켜 조선을 구하고자 하는 제자의 이야기라니! 온정을 주고받던 이를 적으로 만나고, 마침내 화해를 도모하는 치열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