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국 어르신이 소장하고 있는 《이순신세가》는 이순신 집안에 대해 쓴 책으로 지은이가 김기환이다. 이 책은 기존의 이순신 관련 기록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순신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난중일기》에 누락된 투옥 기간 중의 일들이 상세하게 나온다. 우선 이순신의 호. 어린 시절 서울에 살 때는 기계器溪라고 불렀고 아산으로 낙향해서는 백암白巖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설 《임진왜란》을 쓴 김성한이 이순신에게 덕곡德谷이라는 호가 있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기계나 백암이라는 호는 처음 들어본다. 《이충무공전서》에도 이순신의 호에 대한 언급은 없다. 흥미로운 내용이다. 이순신이 열너덧 살 무렵에 개인 글방을 열어서 《자치통감》을 가르쳤다는 일화도 재미있다.
--- p.48, 이순신에 대한 새로운 기록, 이순신세가
밝고 환한 조명 아래 우주복을 입고 걸어가는 사람, 터널 벽은 투명한 특수유리로 되어 있어 바다생물들의 모습이 훤히 보인다…… 이 정도는 돼야 해저터널이지! 그런데 당시 동양 최초라고 자랑하던 해저터널은 왜 그리 어둡고 시시해 보이던지. 어린 나로서는 처음으로 본 해저터널의 초라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거기다 이 터널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뚫은 것이라는 사실에 더욱 실망스러웠다. (중략) 그런데 이 해저터널 옆에 이순신 사당의 효시가 되는 착량묘가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이순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만큼 착량묘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 통영항구의 중심 강구안에서도 조금 벗어나 있고 통영대교 아래쪽이라서 더욱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이순신을 향한 통영 사람들의 존경이 넘쳐나는 곳으로 이순신 답사를 위해 통영을 찾았다면 꼭 빠뜨리지 말고 둘러봐야 할 장소다.
--- p.171, 이순신 사당의 효시, 착량묘
세병관은 ‘만하세병挽河洗兵’, 즉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다’라는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말이다. 은하수를 끌어와서 병기를 씻는다니 이 얼마나 심오하고 낭만적인가? 무기는 남을 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세병관은 매년 8월에 열리는 한산대첩제에서 옛 모습으로 부활한다. 통제사가 삼도수군을 병선 마당에 집결시켜 점검하던 군사점호를 세병관에서 재연하는 행사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해관사열식이라고 보면 되겠다. 한산대첩제는 세병관을 비롯해 충렬사, 한산도의 제승당과 남망산, 통영 앞바다 등에서 열리는데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이순신 관련 축제 중에서 가장 볼만한 축제가 아닌가 싶다.
--- p.176, 은하수로 병기를 씻다, 세병관
진주박물관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된 별급문기는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나는 전시회에서 직접 찍어 온 별급문기 사진을 카페에 올렸다. 그 무렵 역시 존모지정의 회원이었던 이천용 씨가 그 내용 풀이에 애쓰고 있었는데 이 작업을 해줄 만한 이가 마땅히 없었다. (중략) 그때 경주에 사는 이종학 씨가 조철재 어르신을 소개해주었다. 조철재 어르신은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며칠 만에 탈초를 마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탈초는 했으나 이번엔 난해한 한자어와 이두가 문제였다. 그때 ‘한길’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또 다른 회원이 나타났다. 그는 이두와 어려운 전문 고어를 명쾌하게 풀어주었다. 덕분에 우람이 씨는 국역 작업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고 이순신의 새로운 자료, 별급문기의 내용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별급문기 국역 작업을 지켜보면서 모두가 뿌듯한 감동을 느꼈다. 전문 연구가가 아니더라도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사랑만으로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 스스로가 기특했던 것이다. 아마도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아마추어 연구자들은 별급문기를 풀면서 우리가 느꼈던 감정들을 경험했으리라.
--- p.223, 임진왜란 전문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아버지의 영면은 내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사건이었다. 어머니를 보내고 울부짖는 이순신의 모습에서 나는 예순을 넘기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난 아버지와의 천륜을 생각했다. 부모 자식의 인연이 이승에서 다할 때 우리는 살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경험한다. 아버지를 보내고 울던 나와 어머니를 보내고 격정에 휩싸인 이순신. 게바위 앞에 섰을 때 나는 이순신보다 내 아버지를 먼저 떠올렸다. 아버지, 그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댔다.
나도 여느 자식들처럼 아버지를 미워했던 적이 있었다. 원망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도 같다. 아마도 그것이 천륜이라고 명명된 그 무엇이 아닐까? 늘 커 보이던 아버지가 앙상한 팔다리를 드러내고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나는 천륜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얼굴과 팔, 다리를 닦아드리면서 나는 아버지가 내게 살과 피를 나눠준 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너무 서둘러 가신 것이 애통했다.
--- p.258, 한양에서 초계까지, 백의종군로
백의종군이나 연안 답사, 그 대장정을 따라 나선다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일단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했고 지도만 보고서 이토록 많은 지역을 찾아간다는 것도 무모해 보였다. 현재의 길이 옛길과 일치하지 않는 것도 난제였다. 하지만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전문 연구가도 아닌 까닭에 오히려 그런 것들을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얼마나 정확한 길을 찾아가느냐보다는 대강의 여정을 따라 밟음으로써 당시 이순신의 마음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하게 된 연안 답사길. 그 시작은 합천 초계였다.
--- p.261, 한양에서 초계까지, 백의종군로
우리 시대에 이순신은 어떤 존재인가, 왜 다시 이순신인가, 이런 질문에 거창한 답을 달고 싶지 않다. 사실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지금 당신의 삶이 몹시 힘들다고 생각된다면, 당신의 일상이 너무 퍽퍽해서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다면, 나처럼 이순신의 삶을 따라 여행을 떠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준비를 많이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난중일기》 한 권과 지도 한 장이면 떠날 수 있다. 남쪽 바다에는 이순신의 숨결이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이순신의 넋이 살아 있는 곳이라면 우리가 그토록 찾고 싶어했던 존재의 이유, 삶의 돌파구, 그 실마리가 희미하게나마 보일 것이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그저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우리 땅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그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땀방울만 보고 와도 좋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일상을 이어갈 힘을 얻고 나의 존재를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