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한지수는 1967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고, 한신대 국문과와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중·단편소설 부문에 중편 「천사와 미모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독자적인 문제의식과 섬세한 언어의 조탁을 통해 신선한 소설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로 이효석문학상 본심에 올랐고, 펴낸 책으로 소설집 『자정의 결혼식』, 장편소설 『헤밍웨이 사랑법』이 있다.
어릴 적 내 별명은 양갈보였다. 미군 부대가 있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데다 누런 머리카락에 주먹만 한 코를 가진 외모 때문이었다. 나는 그 부당한 별명이 싫었고 도망치듯 도서관으로 달려가 동화책을 읽곤 했다. 그리고 그 동화 속에서 나를 닮은 소녀들을 만났다. 그녀들은 놀림받는 외모를 가졌지만 한결같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주인공이 되는 과대망상을 품었다. 그 과대망상은 내게 성장호르몬이었고 온갖 상처로부터 백신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문학관은 없지만 인생관은 있다. “과대망상을 지니고 전화위복을 이끌어내면서 꾸준히 진화하는 것이 인생이다.” 양갈보라는 별명이 싫었던 소녀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고향을 등장시킨 소설로 전화위복을 하고 소설가로 진화했듯이. 지금도 괜찮은 과대망상 하나를 품고 있다. 이 소설이 내게 전화위복이 되리라는!
참다못한 내가 벌떡 일어나 애원하듯이 절규한다. “참 죄송하지만, 조금만 일찍 죽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 나를 두 달만 살려주면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스스로 죽겠다니까 그러네.” “그러면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긴단 말입니다.” “자네들은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지만 나는 인생 막바지에 아무런 마무리도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어느 쪽이 더 억울하겠는가?” “피해자는 언제나 억울한 법입니다. 우린 이 일이 성공하면 이 나라를 뜰 겁니다.” “이보게, 언제나 성공한 순간부터 위기가 시작된다네. 자네가 날 죽인 순간부터 자네 인생은 위기에 봉착할 거란 말일세. 내 손에 거액이 들어온 순간부터 그 일을 성공시킨 내 애인에게는 위기가 시작된 셈이었지. 자네들은 아직 젊지 않나? 이 늙은이 말을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네. 비우고 또 비우면 길이 보인다고 했지 않은가.” _64~65쪽
“형님, 우리 이거 때려치우고 다른 사기나 칩시다. 아무래도 사람 죽이기는 애초에 글렀습니다. 인간은 다 자기 식의 삶이 있는 법입니다.” “삶? 너 지금 삶이라고 했냐?” “예, 삶이오.” “나는 그 삶이라는 단어가 싫다.” 살과 삼 사이를 교묘히 발음하는 것도 그렇고 왠지 묵직한 느낌이 들어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_123쪽
“(……)그 말에 부끄러움을 견디다 못한 미모사는 그 자리에서 한 포기 풀로 변하지. 손을 대면 움츠러드는 건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해서 꽃말도 부끄러움이래.” “그런 말 들었다고 다 풀로 변해버리면 이 세상은 벌써 숲으로 변했겠네. 집집마다 풀이 무성해지면 환경엔 좋겠네.” 장군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뜬다. 저런 시선에도 면역이 생겼는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장군이 미간을 모으고 상을 찡그린다. 그 바람에 눈썹이 살짝 붉어진다. “형, 미모사는 신경초야. 그래서 밤에도 잎을 접고 오므라들어. 알겠어? 식물도 자기보호본능이 그렇게 뛰어나.”_154쪽
나는 아이의 눈을 들여다본다.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이면서 흔들리는 듯하다. 그 눈동자에 백오십 평 하늘이 고스란히 떠 있고 그 하늘 가운데 내가 보인다. 초조와 체념을 칠 대 삼으로 섞어 버무린 얼굴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아이는 나를 오랫동안 볼 수 있도록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 한참 후에 아이가 눈을 깜박이더니 내게 괜찮냐고 묻는다. “힘들지요? 많이 아프고.” 무당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들었다면 목 놓아 울었을 것이다. 자기 속내를 알아주는 말을 들으면 갑자기 모든 게 서러워 흐느끼게 되듯이. 나는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의 눈 속에 비친 내가 정말로 힘들고 아파 보인다. _196쪽
슬쩍 건드리거나 입김만 불어도 금방 잎을 접는 것이 신기해서 그 근방의 미모사들을 갖은 방법으로 건드리며 시간을 죽였다.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다가 입김을 불어보았다.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고 손으로 만져보다가 옷깃으로 스쳐보기도 하고 나뭇가지로 찌르다가 발길질에 이단 옆차기, 그다음에는 침도 뱉으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가해에도 가속도가 붙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 꼴을 본 캐디들이 깔깔대며 지나갔다. 외압이 가해지면 수분이 재빨리 밑동으로 내려가서 자신을 보호하는 식물이라며 캐디 하나가 아는 체를 했다. 그런데, 한인협회 이사라는 작자가 나를 “미모사보다도 못한 놈”이라며 마닐라까지 떠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밥 빌어먹다가 형편 좀 피니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더라”는 부연 설명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그런 놈은 그냥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지는 놈이다. 찾아가서 냅다 돌려차기를 하려다가 참았다. 밥 빌어먹던 내가 이 동네 유지 행세하는 것이 배가 아픈 모양이지! _34~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