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세상의 모든 음악』 스튜디오를 찾는 강민석 씨의 모습은 조금 기이한 데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꼿꼿한데 어딘가 구부정하지요. 구김 있는 셔츠가 잘 어울리지만 늘 들고 다니는 사각의 가방처럼 빳빳한 구석이 있습니다. 길고 마른 체격이 까다로운 인상을 주는가 하면 방송 전 셔츠 끝으로 쓱쓱 닦는 안경은 언제나 부옇습니다. 그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는 법이 없지요. 적확한 단어를 고르고 뜻을 제대로 짚어내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나 할까요. 오래 마이크 앞에 앉아 본 사람 특유의 흐름과는 사뭇 다른 그의 호흡과 화법이 제게는 참으로 낯설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런데도 30분 남짓 주어진 그의 코너 ‘세상 골목에서 음악을 듣다’는 조금씩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
새벽 길에 혼자 하는 산책과 음악 없이 떠나는 여행에 대하여, 고독과 먼 곳에 부는 바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말을 그대로 글로 옮겨 보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니 과연 그의 글은 그대로 그의 말이더군요. 아니 오히려 더 말다웠다……라고 말한다면 이상할까요. 친근함과 온기가 더해진.
에디트 피아프의 뜨거운 삶으로 시작해서 숲 속에 침잠하는 중년이 된 소년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이 책을 단숨에 읽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글로 전하는 음악들이 순간 너무나 간절하여 당장 찾아 듣고 싶은 맘을 누르기가 어려웠거든요. 생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연약한 삶들이 마음에 품은 애처로운 희망을 만날 땐 기어이 뜨거운 차 한 잔 내려 마셨습니다
.
그는 다 타고 남은 재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 뒤적이고 있을 것 같습니다. 타오르던 열망이 가라앉고 식어 버린 뒤에도 적막함을 견디며 그 시간의 흔적을 기어이 찾아내어 그의 창 앞에 올려놓을 것 같습니다.
힘을 빼고 노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의 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힘이 빠지는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노래요 음악이지요. 이 책이 음악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며 그러나 상처받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한 끼의 식사가 되고 한 편의 시가 되며 위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제게 그러하였듯 드넓은 음악의 바다를 항해해야 할 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거라 믿습니다. 또한 그의 글 가운데 ‘냉랭하게 센티멘털하기’는 바로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임을 독자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정은아(방송인)
영화를 비롯한 잡다한 분야의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입장에서 본다면, 가장 쓰기 어려운 것이 음악에 관한 글이다. 아예 음악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모 일간지 문화부에 있을 때 대중음악 담당이기도 했고, 다른 모 일간지에는 영화음악 칼럼을 쓰기도 했다. 어릴 때는 『월간팝송』을 끼고 살았고 아트 록과 재즈에 심취한 적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보다는 조금, 조금 더 아는 수준이다. 그러니 음악에 대해서도 못 쓸 건 없다. 화성이, 악곡이 하는 전문적인 내용을 떠들 것이 아니라면, 감상을 적고 역사를 훑고 하는 정도라면 못 쓸 것도 없다.
하지만 음악에 대해 글을 쓰기는 역시나 꺼려진다. 그냥 감상 정도라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음악의 정취가 어떻고, 어떤 감흥을 불러오고, 또는 음악의 사회적 의미나 트렌드에 대해서도 쓸 수는 있다. 요컨대 음악의 외적인 부분에 대해 건드리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의 테크닉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걸 잘 알면서도 여전히 꺼려진다.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뭔가 다른 영역인 것만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감상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다른 무엇인가, 음악에게는 있다. 어쩌면 강민석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것일 게다.
‘음악은 사각의 프레임을 통해 들여다보지 않는 ‘청각’의 경험입니다.’
결국은 ‘사각의 프레임’으로 환원시켜 이해를 하겠지만, 청각은 말 그대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영혼에게 형식이 있다면 음악과 가장 유사할 것이라는 말에, 나는 적극 동의한다. 희로애락을 넘어 경건함과 때로는 초월까지 직접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음악의 힘이란 게 거기에서 기인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음악은 때로 영혼의 한가운데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유자적하게 흘러 들어온다. 그러니까 그냥 느끼는 것이다. 음악의 무엇과, 내 안의 무엇이 조응, 공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듣는다. 음악에 관한 글쓰기는 여전히 꺼리면서.
강민석의 글은 익히 보아 왔지만, 가장 눈에 들어온 건 『브뤼트』를 만들면서 칼럼을 받았을 때였다. 『브뤼트』에서 칼럼을 받을 때는, 가급적 필자가 원하는 글을 자유롭게 쓰게 하는 것이 모토였다. 데스크의 입장이 되어, 차분하게 읽은 그의 글은 정갈하면서도 자유로웠다. 음악에 대해 쓰는 글이 가장 재미없게 읽히는 순간은, 자유롭지 않을 때다. 정보에 짓눌리거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로 음악의 정취를 훼손하거나, 의도적인 거짓을 남발할 때.
음악이라는 형식은 그 어디에도 구애 받지 않는다.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자신의 노래가 있다. 그들의 영혼이 토하는 대로, 그들의 노래는 만들어진다. 그들이 살아온 대로, 그들의 역사가 만들어진 대로. 전혀 살아 본 적도, 만나 본 적도 없는 이들의 노래에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조응하는 건, 머리로 이해하지는 못해도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를, 그들의 영혼을.
그의 글은, 그 자유로움을 따라가는 것만 같다. 은은하게, 차분하게 음악이 이끄는 대로 독자를 이끈다. 『바람이 속삭이는 너의 이름을』이라는 제목처럼, 우리가 느끼는 그들의 영혼을 통해 우리는 결국 나의 영혼을 들여다보게 된다. 강민석의 글은, 그런 진정한 치유의 음악을 만나게 하는 훌륭한 예언자다. 먼저 그 음악을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친절한 글로 우리를 음악으로 인도해 주는. 마침내 나를 만나게 하는.
『바람이 속삭이는 너의 이름을』은 에디트 피아프, 마이클 잭슨, 닉드레이크, 데이비드 길모어, 존 로드 같은 친숙한 뮤지션부터 그리스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브라질의 올리비아 이미, 독일의 피아니스트 베른바르트 코흐, 스페인의 수레다, 집시인 비센테 아미고, 한국의 피아니스트 신이경, 튀니지의 아누아르 브라헴 그리고 네이티브 아메리칸 플루트 연주자인 R. 카를로스 나카이와 인디언 음악인 『인디언의 길』 등 세상의 모든 음악을 선보인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책을 덮고 나면 아니 당장 글을 읽어 내려가는 그 순간 순간, 바로 그 음악이 듣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 당장 이 음반들을 어떻게 구해야 할까. 나도 그게 걱정이다.
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前 『브뤼트』 편집장)
여행지를 통째로 가져오고 싶을 때,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여기만 아니면 좋겠다는 마음이 슬며시 파고들 때, 나는 『강민석의 세계음악여행』을 듣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바라나시 갠지스의 붉은 석양이, 포탈라 궁을 감싸는 경건한 독경 소리가, 히말라야의 알싸한 바람 냄새가, 타클라마칸 사막의 파도 치는 모래바람이 내 눈 앞에 되살아난다. 나는 그가 음악으로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의 먹먹하고 여백 가득한 목소리를 글로 옮겨놓은, 우리의 여행을 기록하는 음악이 여기 있다. 행간 속에 숨어있는 지도를 펴고, 오늘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긴 꿈을 꾼다.
조현숙(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