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도 불립니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 따르면 하늘의 신의 아들 해모수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부모의 허락 없이 해모수와 사랑을 나눈 죄로 쫓겨난 유화 부인은 동부여 금와왕의 눈에 띄어 궁궐로 들어가게 되었지요. 그곳에서 햇빛으로 변신한 해모수에 의해 임신하게 되었고 얼마 뒤 알을 낳았습니다. 금와왕은 이 알을 버렸다가 유화부인에게 다시 돌려주었는데 그 알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주몽입니다. 아이는 7살이 되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쏠 줄 알았지요. 아이의 이름이 주몽(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몽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하여 금와왕의 일곱 아들에게 시샘을 받게 되었어요. 기원전 37년 주몽은 결국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신하들과 함께 동부여를 탈출, 압록강 유역의 졸본에 도착하여 고구려를 세웠어요. 이듬해에는 졸본 근처에 있는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아 내고, 기원전 32년에는 행인국,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킨 뒤 그 땅을 차지하여 나라의 힘을 크게 길렀어요. 동명성왕은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찾아온 맏아들 유리를 태자로 삼은 뒤 같은 해 9월에 눈을 감았습니다.
-본문 19p, '주몽‘
만적은 1198년 개경의 북산에서 나무를 하던 중 미조이, 연복, 성복 등 다섯 명의 노비를 만나 반란을 계획했지요. 이때 만적은 “무신난 이후에 높은 벼슬아치들이 천한 출신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니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상전들을 죽이고 또 노비 문서를 불태워 이 나라에 천민이 하나도 없게 하면 공경과 장상은 모두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순정이라는 동료의 배신으로 실패했고, 만적과 그의 동료 백여 명은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본문 45p, '만적‘
연산군은 성종의 큰아들로 어머니는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먹고 죽은 숙의 윤씨입니다. 1494년 즉위한 연산군은 점차 사치와 향락에 빠졌어요. 1498년과 1504년, 두 차례 사화(조선 시대 신하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 몰려 큰 피해를 입은 사건)를 일으켜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과 어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자신에게 옳은 말을 한다는 이유로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성균관을 놀이 장소로 바꾸는가 하면, 전국의 미녀들을 뽑아서 바치게 하는 등 온갖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결국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의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을 내쫓고 이복동생인 진성 대군(뒤에 중종)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연산군은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2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본문 66p, '연산군‘
전두환은 1955년 육군 사관 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습니다.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이후 정치에 뜻을 둔 군인들의 비밀 모임인 하나회를 만들어 호시탐탐 권력을 노렸습니다. 그러다가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되자 12월 12일, 계엄 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는 등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을 전국에 실시했고, 이 과정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무수한 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 같은 해 8월에 열린 엉터리 선거를 통해 11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1981년에는 바뀐 헌법에 따라 선거를 치르고 다시 1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국민들을 참혹하게 짓밟았어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나자 민주주의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 간신히 위기를 넘겼습니다. 1997년 군사 반란과 광주 학살, 부정부패 등을 이유로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곧 특별 사면되어 풀려났습니다.
-본문 110p, '전두환‘
붕당이란 뜻이나 이익을 함께 하는 무리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정당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중기인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이 나뉘며 붕당이 생겼고, 이후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비롯한 수많은 붕당이 출현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같은 스승 밑에서 학문을 하던 사람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에 의한 정치를 붕당 정치라고 부릅니다. 오늘날의 정당들이 서로 다른 정책과 이념을 가진 것처럼 붕당 역시 긍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숙종 때에 이르면 붕당 정치의 부정적인 면모가 커져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여러 신하들이 목숨을 잃는 등 큰 피해가 일어났습니다.
-본문 166p, '붕당 정치‘
쇄국 정책은 조선 시대에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고 나라의 문을 굳게 닫도록 한 정책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밖으로는 서양 세력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고 안으로는 천주교가 널리 퍼지는 등 큰 변화가 밀려들었습니다. 1842년에는 중국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조선 사람들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굳게 걸어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아내고 안으로는 천주교를 탄압하였습니다. 이것을 쇄국 정책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쇄국 정책을 편 결과 조선은 당시 세계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 181p, ‘쇄국 정책’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