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람들로부터는 '남들은 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적으로 하는 사람', '무엇이든지 맡기면 되는 사람',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등등의 아주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의 내면에는 너무 지나치게 자기를 희생하면서 남들의 청을 들어주는 데서 자기의 삶이 상당히 침해당하는 것에 대해 다소간의 불만스러움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내면의 갈등이 전혀 없이, 의연하게 또는 성숙되게 남의 청을 받아주면서 지내왔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그런 경향에는 그의 가족관계-가족의 역사-에서 오는 요인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교회에서 중요 직책을 맡아 오셨던 아버지 역시 'No'를 못하시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닮은 것과 함께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에는, '그리스도인은 거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대화를 하면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야하는 사람'이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서(Here and Now)' 되어야 한다는 의식말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 곧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현재적으로 항상 지킬 수 있는 인격적 성숙이 실제로 자리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격의 힘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내면적인 자기(의 욕구. 필요. 소원 등등)를 억압하는 가운데 외면적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 같은 사람의 모습을 띠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계속 진행이 되는 가운데 그의 외면의 모습과 내면의 모습 사이에 괴리가 점차 벌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문제로 생각되는데, 다음과 같이 재미나는 얘기를 들려준 분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네모꼴의 사람인데, 기독교를 믿은 후에 교회를 가서 설교를 들으면 원꼴이 되라고 하고 성경을 읽어봐도 원꼴이 되라고 하는 것 같아서, 원꼴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에 자기를 보니 자기는 원래의 자기인 네모꼴도 아니고, 되려고 애썼던 원꼴도 아닌 세모꼴이 되어 있어서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세모꼴의 자기가 자신에게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고 합니다.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된 이후,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면의 자기와 외면의 자기가 얼마나 일치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혹 둘 사이에 어느 정도 괴리가 있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종류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혹은 고통을 당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상담하고 정신치료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는 다소 차이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라 평가하면서, 언젠가 지면에서 함께 치유적으로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이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지향적 목표에 조기에 노출이 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해 봄으로써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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