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하는 니르아이신이라는 여진 이름을 가진 소년으로 일곱 살 때, 광개토태왕의 여진 땅 정벌로 국내성에 노비로 끌려와 고구려 최대의 채석장인 양차 석도방에서 일하게 된다. 아진이라는 고구려 이름을 얻게 된 그는 우연한 기회에 무술과 유학을 익히게 되며 석수장이로서 석수 공장에서 뛰어난 기량을 과시한다. 그러던 도중 태자였던 장수왕을 만나게 되고 광개토태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광개토왕비)을 건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 왕의 신임을 받게 된다.
특히 광개토태왕의 외아들로 왕위에 오른 태자 거련(장수왕)과 아진의 운명적인 만남은 고구려를 나라다운 나라, 백성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강성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장수왕의 웅지를 실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만남 이후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에서 서로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장백산의 용학 스승에게서 조의선인의 무술을 함께 전수받는 등, 끈끈한 인연으로 우정을 키우는 이 두 사람의 용기와 신념에서 삼국 중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로 성장한 고구려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장수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아진은 내직 군관으로 임명되고 평양성 축성에 비중 있는 책임을 맡아 대성산성이며 안악궁 건립에 참여하며, 북위에 파견되는 고구려 사신단의 일행으로 참여하여 견문을 넓힌다. 또한 장수왕이 여러 호족들의 결사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한 평양 천도에서도 아진은 중요한 역할을 하여 중장군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말갈인들을 규합, 통솔해서 말갈인들로 이루어진 정예부대를 만들고 그 시기 한강유역에서 벌어진 삼국(여,나,제) 간의 전투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신라와의 실직주 전투 등에서는 지대한 공을 세워 상장군에 오르는 등 대창하에 대한 왕의 신임은 점점 두터워진다. 삼국 사상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였던 고구려의 한산성 공격 때는 장수왕과 함께 일선에 나섰으며 이 전투는 대창하의 지략이 한껏 발휘된 전투였다. 또한 백제 개로왕을 미혹케 했던 고구려 승려 도림을 왕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477년 장수왕은 끝까지 고구려에 복속하지 않고 있던 헤이룽장성 인근의 흑수 말갈족을 침공하는데 대창하는 피눈물을 흘리며 대의를 위해 동족에게 피를 뿌리게 한다.
마침내 아진, 대창하는 478년 숙신 정벌 당시의 부상이 악화돼 평양성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 78세. 당시 여진족으로는 가장 장수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 이는 장수왕과 함께 섭생을 잘했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장수왕은 98세에 타계)
여진인이지만 고구려인으로 살아야 했던 시대의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장수왕을 만나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키우는 데 일조한 대창하의 일생은 동북아 평화 연대를 꿈꾸는 오늘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또한 장수왕과 대창하의 진취적인 기상은 만주족과 우리 민족이 불가분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면서 고구려 역사, 나아가 만주역사가 중국 한족의 역사가 될 수 없음을 웅변하는 실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