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사 농성사건을 맡아 10명의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장수길 전 판사에겐 변호사 개업이란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기업체에 상근하며 법률 관련 업무를 취급하는 ‘사내변호사(In-House Counsel)’나 법학전문대학원 즉, 로스쿨의 ‘변호사 출신 교수’로 진출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이런 자리가 드물었던 당시엔 판사를 그만두면 곧바로 변호사 사무실을 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4년 만에 판사를 그만 둔 그에게 변호사 개업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정권이 재조(在朝) 경력 즉, 판사나 검사로 근무한 기간이 15년이 안 되는 사람은 최종 퇴임지에서 개업을 할 수 없도록 변호사법마저 개정해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정부에 불리한 내용의 판결이나 수사를 하고 그것 때문에 사직한 판, 검사에게는 변호사 개업 자체를 제한함으로써 판, 검사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재임명 탈락 통보를 받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변호사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장 변호사였다. 게다가 지방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로서는 앞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장 변호사는 서울 출신으로, 서울 사대부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장 변호사는 같이 법복을 벗은 다른 전직 판사의 동업 제의도 거절하고 이후 8~9개월을 하릴없이 흘려보냈다.
1973년 겨울의 어느 날, 실의에 빠져 있는 장수길 변호사에게 김영무 변호사가 새로운 형태의 로펌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서울대 법대 동기이자 고시와 사법시험을 1년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합격하고 사법대학원을 함께 수료한 친구 사이로, 학창시절의 두 친구가 뜻을 함께하면서 아시아 최고 로펌 김앤장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1장 아시아 최고 로펌 | 두 친구의 의기투합
젊은 변호사들의 합류는 곧이어 시동이 걸린 김앤장의 초고속 성장을 뒷받침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김앤장은 우선 변호사 수로 대표되는 규모에 있어서 다른 로펌을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1년 뒤 검사가 되어 김앤장을 떠난 유국현 변호사를 제외하더라도 1976년 정계성 변호사를 포함해 3명이던 김앤장의 변호사 수는 3년 뒤인 1979년 종전의 2배가 넘는 7명으로 늘었다. 1년 뒤인 1980년 3명의 변호사가 한 식구가 되는 등 해마다 상당한 비율로 전체 변호사가 늘어나는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리며 발전을 거듭했다.
규모의 확대와 함께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1980년을 전후해 김앤장에 합류한 초기 멤버들의 특출한 면면이다. 이들은 사법시험 수석 합격, 최연소 합격, 대학 3학년 때 합격, 사법연수원 수석 수료, 대학 수석 입학·졸업 등 ‘똑똑하다’는 레테르를 한두 개씩 달고 다니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재들로, 30년이 지난 지금 김앤장의 수많은 업무분야를 나눠 맡으며 해당 분야의 핵심 파트너 변호사로 맹활약하고 있다.
말하자면 초기부터 유능한 인재가 모여들며 세계의 어느 로펌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을 탄탄한 맨파워를 구축한 곳이 김앤장인 셈인데, 젊은 인재들을 끌어 모으는 데 앞장섰던 김영무 변호사는 “돌이켜보면 운도 꽤 좋았다”고 초기 리쿠르트의 성공을 뿌듯해했다. 뒤이어 합류한 수많은 변호사의 맏형 격인 정계성 변호사는 또 “내 경우를 빼면 대부분 신원문제 등 임관에 하등 장애사유가 없었음에도 판, 거마를 마다하고 김앤장을 선택했다”며, “가족의 반대가 심했던 점 등을 고려하면 후배들의 선택은 대단이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들은 판사 임용이 좌절돼 김앤장을 선택한 정계성 변호사의 경우와는 달리 스스로의 의지로 판, 검사 임관을 포기하고 김앤장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사법연수원 출신 변호사의 로펌 행이라는 한국 로펌 업계의 큰 흐름을 이끌어 낸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김앤장은 물론 다른 로펌들에서도 연수원 출신 변호사의 합류가 이어지며 한국 로펌 업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발판이 마련됐다.---1장 아시아 최고 로펌 | 젊은 인재들의 합류
1970년대 불어닥친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위축되었던 한국 경제가 1980년대 들어 제5공화국 정부의 경제개방정책을 통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시대적인 배경도 김앤장이 초고속 성장을 이어가는 데 순풍으로 작용했다. 이 시기에 외국인투자가 전면 개방되었으며, 제약 분야 등에선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의 국내 합작투자가 줄을 이었다. 로펌 업계에 일종의 특수가 일었다. 인재를 꾸준히 확보하며 역량을 축적해 온 김앤장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쏟아져 들어오는 사건들을 처리했다. 그러면서 짧은 기간에 전문성과 실력을 강화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렸음은 물론이다.
“김앤장이 미국의 로펌들처럼 매우 수준 높은 기업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장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죠. ‘아, 앞으로는 이 분야가 변호사의 새로운 방향이 되겠구나’ 하는 인식이 법조계에 퍼지면서 우수한 인재들이 계속 몰려들었고, 이들이 분야별로 업무를 관정하면서 고객들도 더욱 김앤장을 찾게 되는 선순환으로 나타나게 된 겁니다.”
김영무 변호사와 함께 창립 초기부터 우수한 인재의 영입에 발 벗고 나선 장수길 변호사는 “결과적으로 창립 초기부터 길게 내다보고 시작한 인재 우선의 경영방침이 그대로 맞아떨어져 오늘의 성과로 이어졌다”며, 김앤장의 인재제일주의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2장 초고속 성장 | 출범 10년 만에 선두로 올라서다
2007년 11월 말, 김앤장은 한국 로펌 M&A사에 큰 획을 긋는 또 하나의 빅딜을 성사시켰다.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엔진이 건설장비 분야의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인 미국 잉거솔랜드(Ingersoll Rand) 사의 밥캣(Bobcat) 등 소형 건설장비 사업부분을 49억 달러에 인수하는 거래를 수행한 것이다. 건국 이래 한국 기업이 해외 다국적 기업을 인수한 최대 규모의 거래로, 인수 금융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특히 전 세계 27개국에 산재해 있는 72개의 법인을 동시에 인수하고 일시에 인수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추진된, 세계 M&A 사례에서도 유례가 없는 거래로 손꼽히고 있다.
김앤장은 특히 이 거래에서 23개의 해외 현지 로펌을 지휘해 복잡한 다국적 거래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주된 자문로펌(lead counsel)의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 로펌의 자문능력이 그만큼 발전했다는 반증으로, 김앤장은 한국투자공사의 미국 메릴린치에 대한 20억 달러 투자(2008년), 두산중공업의 체코 터빈 원천기술업체인 스코다 파워(Skoda Power) 인수(2009년) 등의 거래에서도 외국 로펌을 지휘해 성공적으로 거래를 마무리짓는 등 해외 M&A 거래에서 발 빠르게 앞서나가고 있다.---3장 한국 경제와 더불어 성장한 40년 | M&A 자문 1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반 한국 법조계의 현실에서 로펌이 소속 변호사에 대한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투자였다. 보통 1~2년이 소요되는 학비와 체재비, 급여는 물론 해당 변호사가 사무실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거둘 수 있는 수익 즉, 기회비용까지 계산하면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는 플랜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변호사들인지라 비록 김앤장에 들어올 때 해외연수를 약속받았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고 한다.
“제가 들어올 때 김영무, 장수길 변호사 두 분이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요. 하지만 워낙 일이 많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이다 보니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해 보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가서 공부하고 와라, 그래야 일을 더 잘할 수 있다.’ 이러시는 겁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약속을 했으니까 기대하는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이 바쁜 와중에 설마 했었거든요. 더구나 그때는 지금처럼 인원이 많지도 않았던 때였죠.”
해외연수 1호인 정계성 변호사의 이야기다.
양영준 변호사도 해외로 떠나는 당일까지 업무와 관련된 회의에 참석한 후 곧바로 공항으로 달려갔을 정도로 사무실 사정이 빡빡한 상황에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공항에서 전화로 부모님께 출국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창업자들의 초심(初心)이 사무실의 바쁜 업무 앞에 흔들렸다면 쉽게 떠날 수 없었던 유학길이었다.---4장 김앤장의 성장전략 | 해외연수 프로그램
장수길 대표는 “김앤장의 제1원칙인 고객중심주의는 우량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단순한 홍보문구라기보다는 전문직 종사자로서 마땅히 지키고, 추구해야 하는 비전이자 지향점”이라고 강조했다. 김앤장의 능력과 전문성을 믿고 중책을 맡긴 고객에게 최고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 이른바 프로페셔널로서의 다짐이라는 것이다.
김앤장에 입사한 신참 변호사가 선배로부터 가장 먼저 배우는 것도 바로 고객에 대한 자세라고 김앤장의 여러 변호사가 이야기했다. 고객을 면담할 때의 자세, 일의 처리과정, 목표의 설정과 대안의 모색 등 모든 사고와 행동의 기준이 고객에 맞춰져 있다. 김앤장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변호사들의 친절하고 겸손한 자세에 놀란다고 한다. 김앤장의 변호사들이 상담이 끝난 의뢰인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해 깍듯이 머리를 숙여 배웅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 김앤장 사람들은 맡아서 처리했거나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는 것으로 유명하다. 외부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다.
김앤장 변호사들은 그러나 이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고객의 비밀유지는 변호사가 지켜야 할 절대적인 의무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진료내역을 말해선 안 되고, 신부가 고해성사 내용에 대해 발설할 수 없슴 것처럼 변호사 또한 고객의 허락 없이 자문 내용을 외부에 노출하면 안 됩니다. 그 자체로 얼마든지 고객의 명예나 신인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
국제중재팀을 이끌고 있는 윤병철 변호사는 “우리가 답답하다고 해서 고객에 대한 비밀유지의무를 포기할 수는 없다”며, “그것은 전문직으로서 변호사가 지고 가는 숙명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앤장에선 외부는 물론 내부적으로도 다른 팀에서 수행하는 사건에 대해 물어보는 변호사도, 알려주는 변호사도 없다고 한다. 한 변호사는 “언론보도를 보고 나서야 우리 사무실에서 이런 사건도 자문하고 있구나 하고 뒤늦게 알게 된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가 준수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 바탕은 물론 고객중심의 문화에 맞닿아 있다.
혹시 고객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그것과 충돌할 경우는 없을까.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도 김앤장 변호사들이 고민하는 대목일 것이다.
---6장 동도서기 | 고객 우선의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