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 42~43
얼마 만에 아상 노장을 따라 젊은 석수는 나타났다. 꾸미지 않은 옷매무새며 오래 손질을 않은 탓으로 까치집같이 헝클어졌으되 윤나는 검은 머리며 두루미처럼 멀쑥하게 여윈 몸피를 얼른 보는 순간 주만의 가슴은 웬일인지 찡하고 울린다. 그는 이런 자리는 난생처음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먼발치에서 머뭇거릴 제 왕은 가까이 오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그는 몇 걸음 더 다가들어 와서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는데 그 고개는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얼굴을 들어라.”
젊은 석수는 한참 망설이다가 분부대로 머리를 들었다. 번듯한 이맛전, 쭉 일어선 콧대, 열에 뜬 것 같은 붉은 입술, 더구나 가을 호수를 생각게 하는 맑고 깊숙한 눈자위, 제아무리 천하명공이라 하더라도 한낱 시골뜨기 석수장이로 이렇게 청수한 풍채와 씩씩한 품위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젊은이 축의 곁눈질하는 눈초리에는 흠모의 빛이 역력히 움직였다. 주만은 그의 얼굴과 풍골에 다보탑의 공교롭고 아름다운 점과 석가탑의 굵고 빼어난 맛이 쩍말없이 어우러진 듯하였다.
pp. 218~219
“나는 아사달 님과 부부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아요. 그야 의엿한 부부가 될 수가 있을 말로야…….”
하다가 주만은 코 안으로 흘러드는 빗물을 풀어내었다.
“그야 애당초에 안 되기로 정해놓은 노릇. 나는 차라리 아사달 님의 제자가 될 터예요. 겨누와 정을 매만져드리는 제자가 될 터예요. 십 년을 배우고 이십 년을 배우면 설마 그 놀라우신 재주의 만분지일이야 못 배울까…….”
“이찬 댁의 귀동따님이 석수장이의 제자가 되다니 안 될 말씀, 안 될 말씀.”
하고 아사달은 고개를 흔든다.
“왜 안 돼요. 안 될 까닭이 무엡니까! 삼단 같은 머리를 끊어버리고 불제자도 되려든. 나무로 깎고 구리로 새겨 맨든 부처님의 제자도 되려든. 살아 있는 이를 왜 스승으로 못 섬길까. 눈앞에 보여주는 재주를 왜 못 배울까…….”
“제발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이 아사달이 빕니다.”
아사달은 머리를 푹 수그렸다.
“아무리 아사달 님이 빌어도 내 마음은 돌리지 못합니다. 동해에서 뜨는 해가 서악에서 떠도 한번 먹은 내 뜻은 꺾지를 못합니다.”
“괴롭습니다. 이 아사달이 괴롭습니다. 제발, 제발…….”
“괴롭다면 내가 괴롭지 아사달 님이야 왜 괴로워요? 여제자 하나 데리는 게 그렇게 괴로워요?”
“제발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부모님께서 정혼하신 자리로 떳떳이 시집을 가주십시오. 그러고 그 좋은 부귀와 영화를 누려주십시오.”
pp. 395~396
“오늘만 해도 처음 왔기에 망정이지, 두 번만 왔드래도 벌써 십 리 밖으로 끌어 내치는 거란 말이야. 여자의 더러운 몸이란 멀리 비치기만 해도 부정을 타는 거요. 그 탑이 꼭 다 된 것을 보고 오란 말이오.”
아사녀도 악이 아니 날 수 없었다.
“제가 어디서 그 탑이 다 되고 안 된 것을 보고 온단 말씀예요. 온, 그 탑 그림자라도 보아야 알 것 아녜요.”
“그림자라도 보아야…….”
하고 문지기는 말책을 잡았으나, 아무리 언변 좋은 그로도 여기는 말이 막히었던지
“그림자, 흥, 그림자…….”
하며 몇 번을 곱삶다가 문득
“오 옳지, 되었다, 되어.”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자기 깐에는 신기한 생각이 언뜻 떠오른 모양이었다.
“여보, 아주먼네, 그러면 좋은 수가 있소. 여기서 훤하게 내다보이는 저 길이 있지 않소?”
하고 아주 친절스럽게 아사녀에게 언덕배기 한복판으로 뚫린 흰길을 가리켜 보였다.
“저 길로 자꾸만 내려간단 말이오. 한 십 리만 가면 거기 그림자못이란 어마어마하게 큰 못이 있소. 그 못에는 이 세상에 어느 물건치고 아니 비치는 게 없단 말이오. 지금 아사달이가 짓는 석가탑 그림자도 뚜렷이 비칠 거란 말이거든. 자 그 연못에 가서 기다려보오.”
하고 어떠냐 하는 듯이 문지기는 배를 쑥 내어밀며 아사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생판으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과연 거기는 둘레가 십 리에 가까운 크나큰 못이 있고, 물이 거울같이 맑아서 모든 그림자가 잘 비친다 하여 그림자 못이라는 이름까지 얻은 것이다.
pp. 629~630
아사달의 머리는 점점 어지러워졌다. 아사녀와 주만의 환영도 흔들린다. 회술레를 돌리듯 핑핑 돌다가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서 쪼각쪼각 부서지는 달그림자가 이내 한데로 합하듯이, 두 환영은 마침내 하나로 어우러지고 말았다. 아사달의 캄캄하던 머릿속도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하나로 녹아들어 버린 아사녀와 주만의 두 얼굴은 다시금 거룩한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하였다. 아사달은 눈을 번쩍 떴다. 설레던 가슴이 가을 물같이 맑아지자, 그 돌얼굴은 세 번째 제 원불로 변하였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