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는 학연과 지연으로 맺어져 굴러가는 나라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의 인생은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맺어지느냐에 따라서 그 행방이 뒤바뀌었고, 여자의 인생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 하는 데 따라 그 성패가 결판나는 세상이었다. 옛날에 비해 세계는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차라리 독재의 그늘에 덮여 있던 시대가 나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이제 세상의 주인은 ‘자본’이었고, 삶의 유일한 전략은 ‘비즈니스’였다.
사랑과 결혼조차 일종의 ‘비즈니스’에 불과했다.
자본의 압제는 그 경계마저 불분명하니, 화염병을 들고 나간다고 해도 던질 데가 없었다. 간교하고도 잔인한 독재자인 자본의 품 안에서 사람들은 단지 실패한 자와 성공한 자, 두 종류만으로 구별됐다. 교육도 일종의 ‘비즈니스’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사실이었다. 백그라운드가 없는바, 정우를 성공시키려면 학연으로 맺어질 인맥도 미리 고려해야 했다. 실패한 자들이나 남아 있는 구시가지에서 학교를 다닌다면 무엇보다 성공한 집안의 아이들을 친구 삼을 기회가 전혀 없을 게 뻔했다. 가짜로 주민등록을 옮기면서까지 정우를 신시가지 중심가의 학교로 보낸 것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그 때문이었다. “당신, 잔 다르크 같아.” 남편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조소를 한다고 느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조소는 실패한 자들이 둘러쓴 비열한 자기방어 수단이었다. 비록 실패해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해도, 아이 하나 있는 것을 남편이나 나처럼 살게 할 수는 없었다. --- pp.53-54
사진기자가 된 것도 사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류사회의 남자들을 더 만나기 위해서였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아무리 가난한 남자라도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나와 달리, 그녀는 대학 시절부터 이미 ‘사랑’조차 자본주의의 요람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본의 세계에선 당연히 사랑도 자본재(資本財)였다. 남자들을 통해 삶을 수직 이동 시키고자 했던 그녀의 전략은 주도면밀했고 끈질겼으며, 마침내 성공했다. 시댁에서 생일 선물로 BMW 5 시리즈를 사줬을 정도였다. 시댁에서는 사진작가로 행세해서 친정의 불민함을 커버했다. 사진전도 가끔 열었고 엉터리 공모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돈 많은 속물 꼴통들한테 멸시당하지 않으려면 내 입장에서 문화예술밖에 없거든.” 그녀가 말하는 ‘속물 꼴통’들은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p.59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이란 누구나 볼 수 있는 데 걸어놓는 문패 같은 거야. 문패는, 지금 걸던 대로 걸어. 그 대신 남몰래 돈 벌어 정우 뒷바라지라도 잘해. 요즘 애들이 진짜 싫어하고 혐오하는 부모는 실패한 부모야. 아이 뒷바라지 못해주는 부모 말야. 나중에 정우가 좋은 대학도 못 가고,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무엇을 주었느냐고 너한테 물으면 뭐라고 할래? 과외조차 안 시키고 외국어고 갈 것 같아? 어림없어 얘. 신시가지 아파트 사는 애들은 주말이면 서울에 있는 영어 학교까지 엄마들이 실어 나르고 있어. 넌 정숙한 좋은 어머니상(像)이니, 그걸 계속 네 문패로 사용해. 그 대신 눈 질끈 감고 다른 각도로 세상을 봐. 처음만 지나면 모든 게 쉬워져. 정우를 네 신랑처럼 살게 하지 않으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니. 자식을 두곤 결과적으론 남는 장사를 해야 한다 그거야. 안 그러면 너, 정우한테 나중에 원망받아!” --- pp.62-63
정우를 원하여 마지않던 좋은 학원에 보냈으며, 투자한 보람이 있어 성적은 금방 올랐다. 뿌듯하고 행복했다. 이대로 가면 외국어고등학교를 쉽게 보낼 터이고, 외국어고등학교만 가면 서울대학교도 쉽게 입학할 수 있을 터였다. 대학이 평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세상이었다. 작은 수고로 정우의 ‘성공’을 보장받는다면 윤리적으로도 꼭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생각할 때도 있었다. 오늘날의 윤리란 효용성의 보장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고객’들을 상대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이 도시에 몸을 팔아 자식의 과외비를 대는 게 나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어머니도 ‘매춘’에 뛰어든 걸 보았다는 ‘고객’이 있었다. --- p.65
프란시스 베이컨은 일찍이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라고 말했다. 그 잠언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진예술의 조류를 설명하던 노교수가, 현대에 들어와서 사진예술은 완전히 자본의 감옥에 들어가고 남은 것은 사진을 빙자한 산업뿐이라고 설파하면서 인용했던 잠언이었다. 자본의 감옥에 들어간 것이 어디 사진예술뿐이겠는가. 정치가 들어가고 문화가 들어가고 사람들의 꿈과 이상도 다 그곳에 들어갔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그녀도 일찍부터 ? 감옥에 들어갔으며, 나 또한 이제 그 감옥에 수감되었다. --- p.70
전사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전선은 이미 침대 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오욕이 가득한 화류항(花柳巷)으로 나가는 어미들이 있는 유례없는 나라가 내 조국이고, 그 어미의 채찍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세습되는 ‘귀족’들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오진 약육강식의 정글 속을 헤쳐 나가는 전사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나라가 내 조국이었다. --- pp.136-137
서울에서 이른 바 ‘강남(江南)’과 ‘강북(江北)’의 경제 문화적 편차는 이미 정상 수준을 벗어나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달려온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가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던가. 어떤 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됐으면서 예전보다 오히려 훨씬 더 가난해졌다고 느낀다. 서울만 그런 게 아니다. 보편적인 현상이다. 전국 어느 도시를 가든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양지와 음지처럼 선연히 분리, 계급화된다. 사람들은 그래서 오늘도 ‘신시가지’만을 향해 기능적으로 뚫린 대로를 불철주야 달려간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고 꿈이며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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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식의 현실 비판적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 ‘문학판’에서도 거의 실종 상태에 놓여 있다. 현재진행형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삶의 사회구조적 문제들을 ‘문학판’에서 오히려 유기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래도 좋은가. 우리네 삶을 몰강스럽게 옥죄는 전 세계적 ‘자본의 폭력성’에 대해, 문학은 여전히, 그리고 끈질기게 발언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지난봄 나는 ‘갈망의 삼부작’으로 명명한 마지막 작품 『은교』를 펴낸 바 있다. 최근작 『촐라체』, 『고산자』, 『은교』에서는 삶의 본원이라 할 존재론적 슬픔이 우선적으로 고려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어스레한 골방에서 존재론적 슬픔과 만나고 있을 때에도 우리를 둘러싼 반인간적 세계 구조는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었다. 피 튀기는 ‘저잣거리’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내가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반응은 중국에서 먼저 왔고, 또 뜨거웠다. 10월엔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소설계』 편집자는 뜨겁게 손을 잡아주었다. 마치 동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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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지면을 마련하고 동시에 출판까지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와 중국문학이 육친의 마음으로 직접 스킨십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자음과모음』, 중국 『소설계』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것이 어쩌다 한 번 스쳐 지나는 사례가 되지 않기를 진실로 바라면서.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