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후회의 갈림길? 두려움은 결국 삶의 연료이다.
고여주 (http://blog.yes24.com/eva1211)
어렸을 때에는 자다가 새벽에 갑자기 눈이 떠졌을 때 맞은 편 벽에 걸려있는 옷가지들이 무서웠다. 학교에 떠돌던 입 찢어진 여자 이야기도 조금 두려웠다. 짖는 소리만 들었을 뿐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앞집 큰 개(어쩌면 작았을 지도 모르는)와 밤 12시가 되면 달라진다던 유관순 동상에 얽힌 전설도 무서웠다. 눈에 보이지 않고 확인되지 않는 실체가 확인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가장 두려웠던 어린 날이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던 어른들의 말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바라는 곳에서 나타나는 사람이 가장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 수 없고 불확실한 것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베일에 싸여 일부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실들이 무서워지고 똑 같은 사물이나 형상이 반복되는 것이 무서워지고 신문을 살벌하게 만드는 각종 뉴스들도 두렵다. 그런데 예술가는 무엇인가 조금 더 두렵다고 한다.
'예술가'라는 단어가 다소 거리감을 줄 수도 있겠다. '예술'이라는 단어의 쓰임은 일상에서 '철학'과 그 용례가 비슷하다. 선입견과 편견을 머리 속에 잔뜩 구겨 넣은 채 상상해보는 '예술가'의 용모와 '철학자'의 외양이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무엇인가 일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조소할 때 '예술 하네', '철학하고 있네' 라고 사용되는 비속어를 보아서도 예술과 철학이란 것은 일상과는 동떨어져있는 별세계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통칭하는 '예술가'와 '예술'은 머리 속에 구겨 넣은 선입견의 신문지를 다 끄집어내고 쉽게 바라본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의미의 예술이다. 꼭 직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원고지와 화판, 카메라 따위의 도구들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한 책인 것이다. 이 책 서론의 말처럼 '천재는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지만, 훌륭한 작품은 항상 등장하기 마련'이고 우리 모두에게는 아직 예술의 기회가 있는 것이다.
예술가의 두려움은 두 가지 방향에서 온다. 자기 속에서 또 하나 자기 밖에서. 자기 밖에서 오는 두려움의 요인들은 인정받을 수 있을 지의 문제부터 경쟁자의 존재까지 개체 외적 요인들이다. 예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도 생활은 필요하고 그래서 냉정하게 따져보면 실질적으로 창조적인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보다 화랑을 청소하거나 고지서를 정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한다. 예술이 대중에게 소개되기 위해 필요한 네트워크의 하나로 전시회나 박물관, 잡지 등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 규범과 공공연하지는 않더라도 은밀한 검열과도 맞서야 한다.
이 책에서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거니와, 정작 두려움의 심연은 자기 속에서 더 시커멓고 까마득하다. 무엇보다 완벽함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대한 무서움이 제일 커다랗게 웅크리고 있다.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한 두려움은 예술을 그저 하는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오고 스스로 위축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가인 척 가식을 부릴 수는 있지만 예술을 하는 척 할 수는 없다. 누구도 나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거나 나의 글을 출판하려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재능의 측면에 대해서도 이 책의 통찰은 핵심을 짚고 있다. 재능이 천성적인 것이고 재능이 훌륭한 예술작품의 전제라면 더 훌륭한 예술작품일수록 더 창조하기 쉬워진다는 결론이지만, 운명이 그렇게 관대하지는 않다. 완벽한 작품에 대한 집착은 멋진 예술이 마치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한두 번의 손짓에 등장하는 것을 꿈꾸게 하지만, 오히려 창조의 황홀한 순간은 잠시이고, 이 이면에는 오래오래 끙끙대며 습관적일 만큼 일상화된 인내의 작업이 존재한다.
완성된 작품은 언제나 결과만을 보여준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씨가 과연 몇만 장의 파지를 냈는지 읽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때 그곳에서'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김이 필름을 몇 천 통이나 내다버렸는지 황홀한 한 장의 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얼마 전 갤러리 현대에서 있었던 천경자 화백의 전시회에 다녀온 것은 그래서 행운이었다. 완성된 그림보다 드로잉과 미완성 작품들이 더 눈길을 끌던 전시였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팔십 세의 작가라면 그저 쓱쓱 그림 따위는 그려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미완성된 그림에 비쳐나는 뭉개버린 또 다른 스케치의 흔적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첫 학기에 수업을 시작하면서 한 교수가 그룹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은 양으로 평가하고 다른 집단을 질로서 평가하겠노라고 하였다. 양으로 평가하기로 한 집단은 한 학기 동안 완성한 작품의 총 무게를 재어 학점을 주고 다른 집단은 A를 받을 수 있는 완벽한 작품에 대해 학점을 주는 것이다. 학기가 끝났을 때, 가장 훌륭한 작품은 모두 양으로 평가 받는 집단에서 나왔다는 이 책의 인상적인 예시처럼 불완전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한발 넘어서는 것은 부단한 노력임을 천경자 화백의 전시회에서 발견하고 희망을 품었다면 이것 역시 아직 버리지 못한 예술에 대한 동경과 나르시시즘일까?
사는 것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굳이 유치하게 끌어오지 않더라도 이 책의 예술가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상에서도 빈번하게 느껴지는 두려움의 양상과 닮아있다. 완전한 삶을 이루고 싶지만 완벽은 멀리 있어 두렵다, 쉽게 말해 앞날이 불안해서 쫀(?)다. 쉽게 이루어 지는 것은 하나도 없고 생각은 애드벌룬만 하지만 조그만 풍선 하나 불어낼 폐활량도 안되고 애드벌룬을 불어내느라 겪을 고통도 감당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생의 온갖 불안감이 가능성인 줄은 모르고 다 무섭다고 미루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은 생각하게 한다. 앞서 예술과 재능의 관계에서 보았듯 완전한 삶이 운명이라면 완전한 삶에 가까울수록 더 살아내기 쉬워야 하는데 전혀 그러하지 않듯이.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에서부터 살아내는 것까지 매 분 매 초, 문제들과 두려움에 맞닥뜨리는 우리는, 무섭다고 그러면서 골목을 뛰는 이상의 아해일 뿐이다. 골목의 끝이 막다른 길인지 뚫린 골목인지 알 수 없고 그래서 두렵지만 어떻더라도 상관없는 것은, 우리는 이미 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레고리 스톡의 '질문의 책'이라는 책이 있다. 해답은 하나도 없고 곰곰이 대뇌피질을 되작거리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만 잔뜩 적어놓은 책.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이 책 역시 생각하게 하는 질문 앞에 우리를 거칠게 내몰아 둔 채 사라지는 또 하나의 질문의 책이다. 이 책의 제일 마지막 질문, 우리는 작품창작이 기쁨을 가져다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안고 모든 심혈을 다해 작품창작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최선을 다하지 않음으로 아예 기쁨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던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이것은 곧 확실성과 불확실성사이의 선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확실성의 선택이 더 안전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예술 앞에서 그리고 삶 앞에서 고통의 길과 후회의 길, 그사이의 갈림길에서 당신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두렵지만 결국 고통의 길을 택하겠다는 나의 선택은 아직 어린 마음의 치기 어린 만용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