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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8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448쪽 | 510g | 140*210*30mm
ISBN13 9788965881803
ISBN10 896588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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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매컬로의 회상]
내 생일 날짜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브라조스 강변의 초라한 오두막에서 텍사스 공화국이 멕시코의 폭정을 물리치고 독립을 선언한 날이니까. 1836년 3월 2일이지. 독립 선언에 동의한 사람 중에 반은 말라리아에 걸려 있었고 나머지 반은 교수대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와 텍사스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야. 난 이 신생 공화국에서 맨 처음 태어난 사내아이였어.
--- p.15

나는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안했어. 내 안의 백인은 당장이라도 허드렛일을 맡거나 노예처럼 혹사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지. 우리는 말을 타거나 사냥을 하거나 씨름을 하거나 화살을 만들었지. 프레리도그, 초원뇌조, 물떼새, 꿩, 검은꼬리사슴, 영양 등 우리 눈에 띄는 살아 있는 놈은 다 도살했어. 크든 작든 표범과 엘크와 곰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잡은 놈들은 깨끗이 씻으라고 야영지 여자들에게 던져주고는 가슴을 사나이처럼 활짝 펴고 으스대며 걸어 다녔지. 강가에서는 들소 뼈와 무거워 들기도 어려운 거대한 조가비 화석을 파내기도 했어. 가재도 잡고 도기 조각도 발견하고 그것들을 절벽 꼭대기로 가져가 바위로 내던져 산산조각내기도 했지. 밤에는 갈대숲의 오리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살쾡이에게 화살을 먹이기도 했어. 그러다 보면 날이 따뜻해지고 꽃이 피고 유카에서 새싹이 돋고 하얀 꽃들이 허공에서 넘실대지. 수레국화나 담요꽃, 그린스레드 등 시야가 미치는 저 멀리까지 푸릇푸릇하고 울긋불긋한 꽃의 물결이 흐드러져 있었어.
--- p.193

포로를 고문하는 일은 마을 여자들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어. 모든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과 함께 모여들었지. 초원의 꽃은 자신이 뽑히지 않아 기분이 상했어. 그들은 남자를 발가벗기고 사지를 벌려서 눕힌 다음 팔과 다리를 말뚝에 묶었어. 그의 몸이 살짝 허공에 떠 있는 모양새였는데, 그들은 재미 삼아 그의 옅은 머리카락과 공포로 오그라든 은밀한 부위를 쿡쿡 찔렀지. 한 여자는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아서는 발정이 난 것처럼 몸을 흔들어대기도 했고. 다들 즐거워했어. 마을의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지. 아이들은 어른의 어깨 위에 앉거나 선 채로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꼭 백인들이 교수형 장면을 구경하는 것과 같았어. 여자들이 아주 작은 모닥불을 네 개 지피더니 그의 손과 발을 한 짝씩 불에 담그더군. 불길이 치솟지 못하게 장작은 조심해서 집어넣었는데, 남자의 비명이 멎을 때에만 불을 더 뜨겁게 타오르게 했어. 비명이 멎는다는 것은 신경이 죽었다는 뜻이었거든. 그들은 남자가 다시 울부짖을 때까지 아주 작은 장작을 하나씩 추가하면서 열기를 점점 더 높이곤 했어.
--- p.417

[진 앤 매컬로의 의식]
침실 19개가 있고 서재와 대형 거실과 연회실을 갖추고 있는 하얀색의 스페인 풍 저택. 그녀와 그녀의 오빠들이 모두 태어난 곳이지만, 지금은 가족의 재회 장소로나 이용되는 주말 별장일 뿐이었다. 하녀들은 내일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정신은 완벽하게 깨어 있었지만, 몸의 나머지 부분은 플러그가 뽑힌 상태 같았다. 그녀는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이런 상태로 만들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86세였고 남들에게는 ‘마냐나의 땅’으로 건너갈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 그녀는 작고 가냘픈 여자였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만나고 나면 금세 이 사실을 잊었다. 목소리가 또렷했고 눈빛이 낡은 권총이나 텍사스에 차가운 북풍을 몰고 오는 구름처럼 잿빛이었다. 분명히 미인은 아니었지만 인상적인 외모였다. 양키 사진사는 바로 이런 모습을 정확히 포착했던 것이다. 그는 지니의 블라우스 깃을 더 벌리게 하고 머리 모양을 방금 오픈카에서 걸어 나온 여자처럼 보이게 했다. 아직 권력의 정점에 이른 때(그때는 수십 년 후에 찾아온다)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진을 찍은 남자는 죽고 없었다. 아무도 날 찾지 못할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 p.21

그러했기에, 그녀에게 소몰이란 먼지를 뒤집어쓴 소들의 끝도 없는 행렬을 터벅터벅 좇아가는, 밧줄로 소들의 발치께를 철썩철썩 때리며 기차역의 임시 우리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지루함의 대명사나 다름없이 따분한 일이었는데도, 그녀는 소몰이를 할 때마다 어김없이 현장을 찾았다. 파리들에게도 덥기만 한 8월이 제철인 지라, 낙인을 달구는 불통 곁에서 뜨거운 열기와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려야 했음에도 그녀는 아랑곳없이 나갔다. 아버지가 지켜보지 않을 때면 두 손을 송아지들의 침에 흠뻑 적셔가며 녀석들을 이동시켰고, 마카도르가 허락하면 쇠 낙인을 들고 그것이 아직 뜨거울 때는 살짝, 식었을 때는 세게, 소들의 몸뚱이에 대고 찍어 눌렀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목동들은 그런 그녀를 보고 즐거워했다. 그들은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딸이라면 불통 곁에 얼씬도 못하게 했을 터였는데도 그녀에게는 선뜻 자신들의 자리를 내주고는 열기를 피해 응달에서 기분 좋게 휴식을 취했다. 다만 그녀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 p.93

중요한 것은 석유였다. 연합국은 전쟁 기간에 석유 70억 배럴을 태웠고 90퍼센트가 미국산이었는데 텍사스산이 주종이었다. 빅 인치오 리틀 빅 인치가 없었다면 노르망디 상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연합국은 텍사스산 석유의 바다 위에서 승리를 향해 항해했던 셈이다.
파이프라인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유럽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폴과 클린트가 아직 살아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이따금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 전쟁도 계속되고 있을지 모르고 조너스까지 죽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이런 저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전쟁은 절대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 p.427

[피터 매컬로의 일기]
현관문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고 그들은 가볍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사격이 시작됐고 한 명씩 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점점 사격 속도가 빨라져 총성이 거의 끊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없었다. 거무스름한 형상들이 문이나 창문 뒤편에서 휙휙 지나갔고 총탄이 몇 발 튀어 나와 뜰의 먼지를 튀어 오르게 했다. 그러다가 정적이 찾아왔고 갑자기 탕 탕 탕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정적이 왔고 잠시 후 좀 더 간헐적으로 총성이 울렸다. 나는 더 이상은 바라보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저 멀리로 누에시스 강과 푸르스름한 강기슭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는 먼지의 장막에 휩싸인 채 줄곧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고, 카사마요르 주위의 대기는 바야흐로 무슨 기적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오렌짓빛으로 환하게 일렁이고 있었는데, 천사의 강림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어떤 거대한 폭발, 그러니까 우리 모두를 지상에서 송두리째 쓸어버릴 태곳적 화마(火魔)의 분출이 임박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 p.186

문과 창문으로 들어온 먼지가 사방에 뽀얗게 깔려 있고 짐승의 발자국들이 진하게 찍혀 있다. 핏자국은 거무스름한 얼룩으로 엉겨 붙어 있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가구들을 한데 쌓아두고 한창 석유를 퍼붓는 중이었다. 나는 집 안 곳곳으로 아버지를 쫓아 다녔다. 우선 침실들에 들렀고 마침내 페드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서류장에서 서류들을 모두 꺼냈다. 오래된 편지들, 사육일지들, 온갖 증서들, 열 세대에 걸친 출생증명서와 사망증명서들, 이곳이 모두 스페인의 땅 누에보산탄테르였던 시절에 받은 원(原) 토지 불하서. (……) 그는 등유로 전부 다 흠뻑 적신 후에 성냥을 그었다. 나는 종이들이 말려들며 불길이 책상 전체에 퍼져가더니 벽을 타고 올라 모든 지명이 스페인식 이름이었을 때 제작된 커다란 텍사스 지도에 옮겨 붙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페드로였다.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의 목소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를 찾아 밖으로 나갔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집 안이 온통 연기로 자욱해 있었다. 그는 이미 다른 방에도 불을 놓았다.
--- p.262

“난 페드로 영감을 좋아했다.”
“많이 좋아하지는 않으셨죠.”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 땅이 과거에 어땠는지 굳이 너한테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너도 내가 이 땅을 망쳐버린 사람이라고 굳이 말해줄 필요 없다. 그래, 내가 망쳤다, 내 두 손으로 말이다, 완전히 망쳐버렸지. 너도 어린 나이가 아니니 이 땅과 캐나다 사이에 목초가 밤색 노새 따위는 지나가기도 힘들 만큼 무성하게 자랐던 때가 기억날 거다. 그래, 1천년 안에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정말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게 바로 인류의 역사야. 흙은 모래가 되고, 기름진 땅은 메마른 땅이 되고, 열매는 가시가 되지. 이게 다야, 우리는 여기서 뭘 어찌 해야 할지 알고 있을 뿐이고.”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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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기막히다. 당당히 미국의 위대한 고전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다. 걸작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케이트 앳킨슨(Life After Life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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