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선생은 그 한 마디로 소래를 끝낸 뒤 나를 뒤쪽 빈 자리에 앉게 하고 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새로 전학온 아이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자랑 섞인 소개를 늘어놓던 서울 선생님들의 자상함을 상기하자 나는 야속한 느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대단한 추켜세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가 가진 자랑거리는 반아이들에게 일러주어, 그게 새로 시작하는 그들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때 내게는 나름으로 내세울 만한 게 몇 있었다. 첫째로 공부, 일등은 그리 자주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 별난 서울의 일류 학교에서도 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었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내 이익을 지켜 주는 데 적지 않은 몫을 하던 내 은근한 자랑거리였다. 또 나는 그림에도 남다른 솜씨가 있었다. 역시 전국의 어린이 미술대회를 휩쓸었다 할 정도는 아니었어도, 서울시 규모의 대회에서 몇 번의 특선은 따낼 만했다.
내 성적과 어울러 그 점도 어머니는 몇 번이나 강조하는 듯했는데, 담임 선생은 그 모두를 무시해 버린 것이었다. 내 아버지의 직업도 경우에 따라서는 내게 힘이 될 만했다. 바람을 맞아도 호되게 맞아 서울에서 거기까지 날려가기는 했어도, 내 아버지는 그 작은 읍으로 봐서는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직급 높은 공무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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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잠든 아내와 아이들 곁에서 늦도록 술잔을 비웠다...나중에는 눈물까지 두어 방울 떨군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또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에서였는지 새로운 비관에서였는지는 지금에조차 뚜렷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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