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영원한 추억이 스며든 이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영욱 아빠가 묻힌 곳을 찾아갈 계획이다. 강아지들의 사랑스런 사진이 있고 아빠를 기억하는 우리 가족 모두의 기록이 실려 있다. 그이 앞에 이 책을 놓을 생각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당신, 정말 고마워요. 많이 보고 싶어요.
--- p.205
암세포가 아버지의 간을 다 먹어간 것 같았다. 병이란 것은 그렇게 무서운 속도로 한 사람의 몸을 잠식해 들어갔다. 살 수 있는 시간이 두 달 혹은 석 달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그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한다는 건, 인생의 최악의 순간이었다. 남아 있는 시간이 너무나 빨리 사라지고도 있었다. 아버지는 진통제로 겨우 버티고 계셨고, 그러면서도 매일 나에게 집안 일까지 꼼꼼하게 설명하시고 맡기셨다.
“이 증권은 엄마를 위한 거고, 이건 너를 위한 통장이고, 이건 영욱을 위한 거고, 이 비상금 통장은 강아지들 간식을 위한 것이고, 모두 합해도 얼마 안 돼. 미안하구나.”
--- p.180
그날은 무척 빨리 다가왔다. 아버지는 새해 1월을 넘기지 못하셨다. 알았다면 그날 병실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알았다면 엄마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끝까지 울지 않게 하기 위해 나를 집으로 보냈는지도 모른다.
한꺼번에 가족이 다 있을 필요가 없다고, 밤을 새울 필요가 없다고 엄마는 밤에 나를 집에 보냈다.
“괜찮아, 이런 혼수상태여도 정신이 돌아오기도 하잖니. 약 기운에 그러신 거야. 푹 주무실 테니까 아침에 다시 와. 강아지들이나 잘 챙겨주고, 좀 치우고. 알았지?”
집에 온 지 몇 시간 뒤 아버지는 차마 감기 어려운 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뜨고 돌아가셨다. 그동안 간신히 지탱해왔던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엄마, 왜 나한테 집에 가라고 했어…….”
아직은 아버지가 너무 필요했을 때, 병 때문에 고통받는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조금 더 함께 있기를 원했을 때, 내가 진짜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서 보여주고 싶었을 때, 큰아들로 더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때,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때, 마지막 모습을 뵙지 못하고 아버지와 이별했다.
--- pp.177~178
주변 사람들은 젊은 시절 잠시 스쳐지나가는 중독 현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에 콩깍지가 씌워진 채로 평생 가는 경우도 있다. 바로 블랙 매직 우먼 커플이었다.
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자 우리 집도 마찬가지로 그 남자를 싫어했다. 동갑내기에다 아직 학생인데 어떻게 벌어 먹여 살리겠느냐 하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결국 우리는 야반도주를 택했다. 남편은 금으로 된 넥타이 핀 같은 것을 쓸어담아 왔고 나는 엄마 비상금을 꺼내서 그와 만났다. 인천에 있는 그의 학교 근처에 같이 살 곳을 마련해보려고 했다. 가출해서 처음 산 것은 세고비아 기타였다. 먹고 살 생각보다 둘이 음악 듣고 노래하고 연애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 p.146
1988년 3월, 태어난 지 딱 30일째 되는 날 방배동에서 분양받으면서 밍키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추억의 앨범을 들춰보는 것처럼 우리에게 밍키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하지만 어느 누가 세월을 이길 수 있을까. 열심히 살고, 사랑하며 살아도 시간은 제 속도대로 가게 마련이다.
인기 프로그램인 「TV 동물농장」의‘고영욱의 개성시대’를 방송하는 동안 밍키는 서서히 털이 빠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새벽에 밍키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는지 보기 위해 일어났을 때 가여운 밍키는 눈을 뜬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아! 아까 두 시간 전에‘응’하던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구나.’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다. 꼭 전할 말이 있었는데, 하지 못한 채 밍키를 보내고 말았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모두 지켜본 밍키에게 먼저 세상을 떠난 영욱 아빠를 만나면 안부를 전해달라고 말하고 싶었고, 또 우리가 얼마나 밍키를 사랑했는가를 말해주고 싶었다.
--- pp.53~54
얼굴을 거꾸로 보나 제대로 보나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슈슈. 그런 외모와 달리 슈슈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구수한 발 냄새다. 발 냄새를 풍긴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발 냄새를 좋아한다. 아마도 슈슈에게 있어 그것은 샤넬 넘버 파이브 향수보다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희한하지만 늘상 일어나는 풍경이 있다. 영욱이 외출했다고 들어와서 양말을 벗어던지면 정해진 주인이 따로 있다. 왕초인 찌루도, 제일 덩치가 큰 쿠키도, 호기심이 많은 꼭지도, 잽싸기로 소문난 누리도 아닌 완벽한 미모를 자랑하는 슈슈인 것이다.
--- p.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