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로 노천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곳은 안개가 끼지 않을 때는 바다가 잘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안개 속에 앉아 커피 마시는 것을 더 즐겼다. 나는 커피에 설탕 대신 안개를 풀어 마셨다. 안개는 내 얼굴과 목덜미를 긴 혓바닥으로 핥아대다가 옷 속으로 스며들어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그러다가 사타구니 사이로 슬슬 비집고 들어와 그것을 주물러대는데, 그럴 때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거머리 같은 안개를 털어내고 담배를 꺼내 물곤 했다. --- p.8
화장실에 들어가 바지를 끌어내리고 변기 위에 앉은 나는 턱에 두 손을 괸 채 눈을 감았다. 세상이 굴러가고 있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다. 모두가 미쳐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자본주의에 잘 길들여진 젊은이들은 꿈과 이상을 접은 채 공무원이 되려고 몰려들고 있고,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안정된 직장, 남보다 많은 수입, 좋은 외제차, 고급 아파트…… 이런 것들이 그들의 꿈이다. 모험심도 없고 젊은 날의 고뇌도 없다. 모두가 눈만 뜨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모두가 잘 살고 있다는 착각.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 p.81~82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요부 같아.”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부드럽고 달콤해요. 안개 때문에 옷을 벗고 있어도 부끄러운 느낌이 안 들어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안개가 옷을 대신해서 몸을 가려주고 있다는 착각에 별로 부끄러움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안개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옷을 벗고 지내면 어떨까요?” --- p.125~126
“모두 열두 군데나 찔렀습니다. 닥치는 대로 찌른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도 성에 안 차 성기를 절단한 것 같아요. 잔인한 여자죠?” 곰은 이미 범인을 여자로 단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슬쩍 딴죽을 걸어보았다. “왜 범인을 여자라고 생각하죠?” “보면 알 수 있잖습니까?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고, 사방에 휴지가 널려 있어요. 섹스하고 나서 정액 같은 것을 닦아내고 버린 것들입니다. 둘이서 한바탕 하고 나서 여자가 남자를 찔러 죽인 겁니다. 보지 않아도 눈에 뻔히 보입니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섹스장면을 찍은 사진들과 동영상을 보여주면 반색을 하겠지만, 나는 왠지 그것을 숨기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이 공범이 된 기분이 들었다. “잘린 성기는 찾았나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더니 곰이 고개를 내저었다.
달맞이언덕을 휘어감는 희뿌연 안개를 걷어젖히며 김성종이 돌아왔다. 김성종은 우리들 보통의 인간성 본질에 대한 문제를 오랫동안 탐구한 작가다. 인간이면 누구나 고민할 수밖에 없는 갖가지 욕망과 자유의 문제는 이번 ‘안개 시리즈’에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추리작가인 주인공이 자유롭게 전국을 떠돌며 글을 쓰고 싶어서 전 재산을 들여 캠핑카를 구입하는 장면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터운 안개처럼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사람을 향한 무한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는 로맨티스트 ‘노준기’의 활약은, 어느 때보다 보편적인 인간성 상실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심야책방』 저자)
영국에 셜록 홈스와 에르퀼 푸아로가 있다면, 한국에는 ‘노준기’가 있다. 각각의 이야기가 장르적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힘 있는 작가 사유의 편린들을 보여주고 있다. 읽는 내내 달맞이언덕의 안개가 가득한 살인사건의 현장,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윤종빈 (영화 <범죄와의 전쟁> <군도>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