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들뢰즈 역시 전소크라테스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파르메니데스적이라거나 또는 존재의 울타리를 처음으로 개방한 시인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 자신들이 이러한 사유자들을 자연학자들로 여기면서 따랐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두자. 그들은 전체의 사유자들이었다. 그렇다. 들뢰즈는 우리의 위대한 자연학자로 남을 것이다. 그는 우리들을 위해서 별들의 불을 사변하고, 혼돈의 깊이를 재며, 비유기적인 생명을 헤아리고, 우리들의 빈약한 궤도들을 잠재적인 것의 광대함 안에 잠기게 하는 사유자로 남을 것이다. 그는 "위대한 목신 판grand Pan은 죽었다"는 관념을 견디지 못하는 사유자로 남을 것이다. (중략)
이런 부류의 모든 자연학자에게서 그렇듯이 들뢰즈에게는 사변적인 꿈이 지니는 그 어떤 거대한 역능이 있으며, 떨리는, 그리고 비록 약속은 없을지라도 예언적인 그 어떤 음조 같은 것이 있다. 그는 스피노자를 철학의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에게 진정으로 합당한 것을 되돌려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해 보도록 하자. 들뢰즈는 전체에 의거한 구원―그렇지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구원 그리고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는 구원―을 고집스럽게 알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도들 중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고.
--- pp. 213∼214
주사위를 던지는 각각의 투척 안에는(또는 각각의 사건 안에는) 분명히 수적인 결과들의 형식적인 구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투퍽의 내적인 역능은 유일하며 일의적이다. 이 역능은 곧 사건이며, 또 이 역능은 모든 던지기들의 던지기인 유일한 하나의 던지기 안에서 우연 전체를 긍정한다.
--- p.166
결국 사람들은 들뢰즈를 그의 시대를 구성한 모든 것에 대해서 호기심을 지닌 사상가로, 찬란한 사건적 표면을 취하는 일에 자기의 사유를 바친 사상가로, 의미의 잡다한 영역들을 건너는 일에 그의 뛰어난 저술을 투자한 사상가로,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고전적인 시대와 관련하여서 그 자신이 라이프니츠에게 속하는 것으로 인정한 바 있었던 덕목에 화답하면서 일종의 현대적인 의미의 바로크적 양식을 창출한 사상가로 판단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바로크적 양식 안에서 다수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뒤섞임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공통의 척도가 배제된 세계의 공존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의 범세계적인 민주주의가 도대체 무엇과 더불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스스로를 전개해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들뢰즈는 이처럼 세계의 혼돈스러움을 즐겁게 사유한 사상가이다.
--- p.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