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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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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웨딩

김리원 | 동아 | 2013년 06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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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6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76쪽 | 354g | 128*188*30mm
ISBN13 9791155110270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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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냄새가 지독했다니까. 지금은 정말 사람 된 거지.”
커다랗게 쌍꺼풀 진 눈, 까만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린 어린 제니의 나이는 10세. 그녀가 또래 친구들을 모아놓고 히죽 웃었다. 대여섯이 몰려 제니의 말을 듣던 아이들은 옆쪽으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선 한 소녀를 힐끗 보았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는 당사자인 듯, 제니의 지껄임을 다 듣고 있으면서도 소녀는 아무 말도 못들은 척 앞쪽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몇 남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냄새가 났었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하얀 피부에 옅은 갈색 빛이 도는 머리칼의 소녀는 희고 고왔다.
“술집 여자 딸이야.”
남자 아이들의 호감어린 눈을 차단하기라도 하듯 제니는 작은 소리로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제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아이들의 표정이 경멸스럽게 일그러졌다.
대진그룹 한 회장의 파티에 가족 단위로 초대되었던 그날, 넓은 규모의 호텔 연회장은 해질녘 시간을 잊게 할 만큼 화려하고 환했다. 홀 곳곳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보석의 광채처럼 찬란하게 반짝였고, 벽과 바닥으로 고급스러운 화이트 대리석이 중세유럽 황실 풍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어른들의 파티였다.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화려한 의상과 실적을 뽐내며 샴페인 잔을 부딪치는 파티엔 어른들의 웃음소리와 인사말들이 먼저라, 가족을 따라와 파티를 즐기는 아이들에겐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시간,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파티였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그들만의 리그로 단단히 맺어진 터라, 아이들은 간만에 또래친구를 만나 파티를 즐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구석 곳곳에 포진해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이 또래였다.
“10세라고?”
최고급 원단으로 만든 베이지색 수제 정장을 빼입은 남자애가 제니에게 되물었다. 10세라면 다들 동갑인 건데 소녀는 제니를 언니라고 부른다 했다.
“응, 내가 빨리 태어났으니까. 그리고 우리 집에 얹혀살러 왔는데 반말하게 할 수는 없잖아.”
소녀와 자매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는지 어린 제니의 얼굴이 습관처럼 싸늘하게 굳었다. 이런 파티까지 저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도, 또래들의 관심에 일일이 답해주는 것도 문득 짜증이 났다.
“너무 싫어. 정말.”
제니의 차가운 눈이 저쪽에 선 소녀, 김수아를 짧게 노려보았다.

“너 이번에도 사물함 난리 났다며? 집으로도 택배가 줄줄이라던데? 아주 소문 다 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발렌타인데이만 되면 초콜릿을 한 트럭씩 받았다는 로한이 부러워 그러는 건지, 배가 아파 그러는 건지 로한에게 묻는 종철의 웃음이 어째 삐딱하게 일그러졌다. 막 중학생이 된 종철은 특히나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았다. 집안에 돈이 얼마나 많건, 공부를 얼마나 잘하건, 당시 유일한 행복의 척도가 이성으로부터의 인기였달까. 돈과 노력으로 살 수 없는 외모 때문에 속으로는 늘 로한을 경계하고 견주게 되었던 때다.
혼자 속세를 떠나 초월한 듯한 얼굴을 하고도 고고한 학처럼 잘나가는 로한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시기심이 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 제 부모 유전자를 잘 받고 태어난 운(運) 덕이지, 인물이나 머리 좋은 게 제 노력은 아니라며 종철이 스스로를 위안해 보아도 역시 눈에 띄는 외모였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중학생이 된 로한은 175센티미터 가까이 자란 키와 늘씬하게 빠진 몸매, 벌어진 어깨에서 삼각 라인으로 좁아드는 비율과 곧게 뻗은 다리 길이까지 감히 범접해 논할 수 있는 소재가 못되었다. 게다가 그를 묘사할 때 으레 따랐던 말처럼 신은 공평하지 않았다. 그를 빚을 때만은 졸았었는지 몸에 이어 얼굴 이목구비까지 완벽하다 할 정도. 한참 2차 성징 중인 그의 눈빛은 차고 무심한 남자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원래 성격이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민감한 사춘기 시절, 갈등이 많아진 가정사 때문인지 굳게 다문 입매로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종철아, 종철아. 넌 종이나 쳐라. 종철아, 로한을 어떻게 말리냐. 얜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인간이다.”
함께 서 있던 또 다른 친구 필재가 종철에게 히죽 웃으며 로한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나 초콜릿이든, 인기든 간에 로한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그는 친구들과의 대화 내내 집중을 하지 못했다.
오늘 이곳이 가족 모임의 파티임에도 어머니가 함께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꽤나 훌쩍 커버린 로한도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이 아버지에 의해 강제된 것이기에 더 그랬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몇 년 전부터 다툼이 잦아지더니 급기야 최근에는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오늘 파티도 어머니에게 말도 없이 도망치듯 로한만 데리고 왔으니 로한으로서는 그런 상황에 신경이 날카로웠다. 한참 예민해질 시기인 그에게 부모님의 가정불화는 어찌할 바 모르겠는 큰 고민을 안겨주었다.
‘너무 싫어, 정말.’
그때 어렴풋 여자 아이의 말소리가 들렸다.
잠시 로한, 종철, 필재의 말이 끊겼던 사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가 중학생 또래인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서로 멀뚱히 마주보고 섰던 그들은 서로를 교차해 보았다. 이제는 좀 컸다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계단의 벽 뒤로 숨은 듯 모여 있던 터라, 그 앞쪽에서 누가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힘내, 제니.’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아이의 위로, 곧 몇 마디 말이 따라붙었다.
‘야, 너 앞으로 제니한테 꼬박꼬박 언니라고 불러라. 까불었다간 가만 안 둘 줄 알아!’
‘쟤 지금은 냄새 안 나지?’
‘어떻게 술집여자 딸일 수가 있어? 완전 꽃뱀인가 보다.’
‘어우, 진짜 냄새나는 것 같애. 향수 뿌리고 다니라고 해. 큭큭.’
말을 뱉어내는 아이들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지만 무슨 상황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때때로 이곳의 아이들은 나이가 어린 만큼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잔인해지니까. 세상 위에 군림하는 분위기의 가정에서 남을 배려하는 따뜻함 대신 경쟁자를 제치고 앞서나가야 하는 냉정함, 그 차고 매정한 것을 먼저 보고 습득하는 문화.
문득 그런 식의 대화에 불편함을 느낀 로한이었지만 마침 저편에 보이는 아버지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대화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로한의 시선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미모의 여자와 어색한 척 인사를 나눈 뒤로 아버지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시종일관 만면에 미소를 담고 둘만의 대화를 이어가는 아버지.
로한은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민감했던 나이였기 때문일까.
여자는 아버지의 말에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양이처럼 웃으며 남자를 유혹하고 매혹시키는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그런 여자를 대하는 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끔찍하게도 그는 이미 사랑에 빠진 것이다. 어머니보다 반절은 어린 여자에게 푹 빠져버린…….
“야, 인마. 니들 친구랑 잘 놀아야지. 그렇게 약 올리면 쓰냐?”
로한의 복잡한 상념을 깨고 계단 벽 앞으로 나선 필재가 아이들 무리를 향해 말했다.
종철이 키득 웃으며 ‘누군데? 누가 냄새가 난다고?’하며 따라나서자, 로한도 아버지에게 박혔던 시선을 거두며 몸을 돌렸다.
“와아!”
곧이어 짧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시선은 뒤늦게 나타난 로한에게로 박혔다. 워낙 유명한 인사였던 중학생 로한에게 마음을 준 초등학생들도 많았기에, 갑작스런 로한의 등장에 아이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올망졸망한 눈들이 반짝이며 로한에게 흥분하자 은근히 질투를 느낀 종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크험, 하며 나서 로한에게로 쏠린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누가 냄새가 난다고?”
“아, 쟤요. 쟤가 이번에 제니 동생으로 집에 왔는데요, 처음에 되게 냄새났데요.”
한 여자 아이가 손가락질을 한 곳에 선 소녀는 내내 모른 척 버티던 평정이 무너졌는지 로한의 무리로 힐끗 눈을 들었다가 곧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잠깐 움직이는 자태에서도 어린 소녀는 우아함을 뚝뚝 흘렸다.
예쁜 아이었다.
“이놈들,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소녀를 힐끗 본 종철이 장난스럽게 엄한 눈으로 아이들에게 충고하고 수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몰래 도둑질하듯 눈을 치켜뜨다 내리는 수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그녀 쪽으로 코를 흠흠거렸다. 정말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겠다는 큰 형의 몸짓이었다. 아이들이 곧 숨을 죽였다. 종철이 코를 막으며 냄새가 난다고 손사래라도 치면 다들 도망칠 것처럼 집중도가 고조되었다.
“음…….”
종철이 수아 쪽으로 얼굴을 내민 채 가볍게 웃었다. 역시나 예쁘게 생긴 소녀의 몸 어디에도 거짓부렁으로 만들어낸 냄새는 흐르지 않았다. 달콤하고 은은한 파우더 향을 확인한 종철이 가만히 수아에게서 멀어지더니 아이들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냄새가 좋기만 하다.”
누구든 토를 달 거면 직접 맡아보고 확인하라는 듯 종철이 씩씩하게 말하자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가장 일그러진 건 제니였다.
종철의 말에 위로가 되었는지 수아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순간 모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얀 피부 위로 붉게 물든 볼,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말간 갈색 눈동자, 오뚝한 콧대까지 예쁘장하고 단정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예쁘네. 그리고.”
종철이 무리의 대장처럼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죽어 있는 아이와 잘 지내라는 무언의 협박이기도 한 그 손짓을 따라 로한의 시선도 무심하게 흘러내렸다.
잠깐 눈이 마주쳤던가. 시무룩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는 소녀의 얼굴에선 절대로 울지 않을 거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어린아이에게 풍겨 나오는 감정엔 결연함마저 어려 있었다. 그때 로한이 느낀 좌절감과 같기 때문일까. 힘주어 다문 입매가 가느다랗게 굳어지는 것이 로한은 아이와 닮은 듯 보였다.
잠시잠깐 로한의 시선이 아이에게 무표정하게 박혔지만 그는 곧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아도 여전히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와 저 여자 때문에 이미 머리가 복잡한 터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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