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목소리가 이신의 가슴에 박혔다. 포로가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는 오로지 살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명천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분노가 온몸을 휩싸고 돌았다. 지금도 여인들은 청나라병사에게 돌아가며 겁탈을 당하고, 아이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대명천조가 웬 말인가. 왜 우리를 구하러 왔다고 말하지 못한단 말인가. 도대체 대의가 무엇인가. 그것이 사람의 목숨, 백성의 죽음보다 더 중하다는 말인가. 그 대의란 대체 누가 정하는가.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선택지를 가지지 못했다. 이제 와서 주어진 선택은 칼을 버리고 죽느냐, 칼을 쥐고 죽느냐 뿐이다.---p.113
“내가 누구의 아들인가는 중요하지 않소. 내가 누구를 섬기는가도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당신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전혀 모른다는 거요. 광해를 몰아낼 때도, 청와 맞설 때도 당신들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몰랐소. 금상도 당신과 같은 사대부들이 옹립하고 모셨지만 어떻게 됐소? 그들은 틀렸는데 당신들은 옳다는 말이오?”---p.191
회절강을 만들어, 그렇잖아도 끔찍한 삶을 경험한 여인들에게 또다른 멍에를 지우는 촌극을 벌인다는 말인가? 또 한번 버린 정절이 물로 씻는다고 회복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회절강이 있다면 그 강물에 가장 먼저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교지를 내린 오랑캐의 주구, 즉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시련이 환향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책임한 지배세력의 자세도 통탄스럽지만 400여 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이 또한 통탄스럽다. _이이화(역사학자) 병자호란 직후의 조선. 전쟁통에 청나라로 끌려갔던 이신이 칙사의 신분이 되어 돌아온다. 실리 외교를 표방한 광해의 세력을 갈아엎은 반정 세력의 척화론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었다. 순전히 외교 실패로 인한 전쟁이었지만 정작 고통받은 것은 백성들이었다. 50만 명의 평범했던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청으로 끌려갔고 그중 상당수였던 여자들은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과 학대를 당했다. 그리고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 이들 여성들에게 남편과 아버지들은 이렇게 물었다. 왜 아직 살아 있느냐고. 몸을 씻고 정절을 회복하라고 마련해준 회절강에 여인들은 침을 뱉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온 여성 대부분이 결국 자결했으며 자결하지 않은 여성들은 자결로 위장해 살해당했다. 하지만 책임지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대신들은 여전히 명나라를 숭배하며 척화론을 노래했고 왕은 미쳐갔다. 이러한 상황 속 뒤에서는 오랑캐라고 침을 뱉으면서도 앞에서는 절할 수밖에 없는 청나라의 칙사가 되어 돌아온 이신은 모든 것을 뺏긴 남자의 복수를 준비한다. 어리석은 왕은 죽여야 한다는 것.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의 복수극이자, 착하게 살았고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죽어간 백성들의 한풀이이다. 소설 속 무책임한 지배세력의 자세도 통탄스럽지만 400여 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이 또한 통탄스럽다. 이이화(역사학자)
하룻밤도 편하게 잠들어본 적 없는, 고독하고 고독한 남자 이신.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비정한 세상, 닿을 수 없는 사랑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토록 속도감 넘치는 소설을 읽으며 인물 한 명 한 명에 깊이 공감한 것은 처음이다. 묵직한 역사소설이자 웰메이드 스릴러의 미덕까지 갖춘 《이신》은 내게 오랫동안 가슴 떨리는 사랑 이야기로 기억될 것이다. 마광수(작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