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륜은 태종의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여러 번 정치적인 탄핵을 받았지만 매번 왕의 보호를 받아왔다. 그만큼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까닭도 있었지만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꽤뚫어 보는 그 자신의 놀라운 직관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자신의 직분을 넘어선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죽으면 국장을 없애도록 청하고, 집안 식구들끼리 장사를 지내도록 해서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륜은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달랐다.
'정승이 죽으면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상례인데 하물며 하륜의 공덕으로 국장을 없애는 것이 옳겠는가?'
태종은 직접 국상을 지시하며 하륜의 가족들에게 장례용품을 보내주도록 했다. 그러나 하륜의 부인은 남편의 유지를 거역할 수 없다며 끝까지 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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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서로 권세를 놓고 다투다 끝내는 역사상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대원군의 쇄국은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실수를 범했고 명성황후의 감정에 치우친 외교정책은 오히려 일본의 침입을 부추겼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임금인 고종은 제대로 한 일이 거의 없었으니 조선의 몰락은 예정된 시나리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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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사람 조보가 어떤 자를 벼슬에 천거했더니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보는 그가 훌륭한 인물임을 알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임금을 설득하려 했지만 임금은 끝내 그가 올린 상소문을 찢어버렸습니다. 조보는 찢어진 상소문을 정성껏 꿰맞추고 풀로 붙여서 임금에게 다시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임금도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무릇 대신이란 굳세고 간절하게 임금의 과실을 아뢰는 것이 본분일 것입니다' 과연 조광조다운 말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이런 집요함에 넌더리가 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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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조에 이르러 황희 정승은 만백성의 친구이자 어버이 같은 존재였다. 그는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자기를 한없이 낮출 줄도 알았지만 불의를 보면 아무 때고 참지를 못했다.
그는 이미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이 기행을 일삼고 다니며 왕실의 품위를 손상시키자 주저없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에 그가 양녕대군을 옹호하여 귀양까지 갔다온 일을 생각할 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공평무사함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황희는 세종 조의 18년간을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왕이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도왔다. 농사법의 개량으로 농민들의 애환을 살피고 천첩소생 자식들에게 부역을 면제하는 등 일련의 애민정책들이 세종과 황희의 합작품이었다.
그는 세종 임금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에게도 신임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군신간의 갈등이 생겼을 땐 훌륭한 중개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숭유억불에 있었으나 세종은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여 궁궐 한편에 불당을 짓기까지 했다. 이것은 국왕이 불교신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내불당 건립문제를 놓고 조정대신들간에 한바탕 논란이 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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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국장을 없애도록 청하고, 집안 식구들끼리 장사를 지내도록 해서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륜은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정승이 죽으면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상례인데 하물며 하륜의 공덕으로 국장을 없애는 것이 옳겠는가?' 태종은 직접 국상을 지시하며 하륜의 가족들에게 장례용품을 보내주도록 했다. 그러나 하륜의 부인은 남편의 유지를 거역할 수 없다며 끝까지 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 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