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제네바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영국의 개방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주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후 지금은 프랑스에 살면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종교와 세속의 믿음에 관한 왓킨스 사전The Watkins Dictionary of Religious and Secular Faith》《2012년 마야 예언The Maya Prophecies for 2012》 등이 있다.
역자 : 박수철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언어의 역사》《노암 촘스키의 미디어컨트롤》《시카고학파》《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역자 ; 정혜정
성신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통번역자로 활동했다. 현재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이방인은 없다》《당신은 코끼리를 잡을 것인가 개미들과 씨름만 할 것인가》《덕의 기술》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살아 있는 한 의문은 없을 수 없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든 자발적인 호기심에 의해서든 앎은 필수요소이며, 정신의 한 기능이다. 초기 인류에게 묻고 답하는 일이 생존의 기술이었다면 현재의 우리에게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질문이 잘못되면 답을 찾느라 자칫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제대로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p.13 [서문]
앎에 대한 욕구는 인간 진화의 추동력이라고 할 만큼 기본적인 요소이다. 여기서 문명 흥망성쇠의 와중에 사라진 지식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알려면 사라진 지식을 복원하는 것이 앎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당분간 전지의 가능성은 신의 영역일 것이다. 앎은 겸손의 과정이다. 우주의 광대함과 기원에 관해 알고 이해하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전부이다.” p.28 [1장 지식]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호튼 쿨리는 거울자아라는 개념을 썼다. 즉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에 맞추어 나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타인이 나를 보는 그대로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본다”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이 되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늘 이렇게 행동한다. 이렇게 부단히 타인의 시선에 나를 순응하다 보면 나의 자아는 엄청나게 불어난다. p.47 [2장 자아]
종교적 신념이 있어야 우주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 미국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지적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우주의 축소판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알면 우주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우주에 싸여 있다.” “싸여 있음”을 경험하는 일은 종교적 믿음과는 무관하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를 관찰하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과학이 우주의 기원과 특성을 밝힐 때마다 경이로움과 놀라움은 깊어진다. p.70 [3장 우주]
목적을 위해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있고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를 묻지 않고 여기에 있는 동안 무엇으로 최선을 다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중국 속담에 “기적은 하늘을 나는 일도, 물 위를 걷는 일도 아니며 바로 땅 위를 걷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어디를 어떻게 걸을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렸다. p.84 [4장 인간]
태어나면 그냥 죽는 걸까? 죽은 후에 영, 영혼, 의식 또는 기억이 환생할 수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환생 개념이 서양보다 동양에 쉽게 자리 잡았음은 매우 흥미롭다. 인과법이라 할 불교의 업보 개념이 한몫했다. 업보라는 작용과 반작용의 연쇄 속에서 죽을 때 못다 한 일을 넘겨받고 후생에서 그것을 마무리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는 영혼이 살아 있을지라도 죽음은 삶의 끝이라는 서양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다. p.125 [5장 영성]
종교는 진리를 표방한다. 하지만 의미와 표현이 다른 탓에 공존이 어렵다. 신도들의 신실함이 그 종교의 옳음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믿음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종교들이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지엽적인 부분보다는 넓은 시각, 공유하는 개념 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p.137 [6장 종교]
많은 사람들이 “신이란 믿자니 안 믿기고 안 믿자니 말이 안 된다”라고 말한 볼테르의 딜레마에 갇혀 있는 듯하다. 무신론자에게는 신자만큼의 믿음이 있다고들 한다. 불신앙은 경험적 증거가 없음을 믿고, 신앙은 왈가왈부할 수 없는 주관적 경험을 믿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 익명의 구도자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무신론에 편승하고자 했지만, 믿음이 굳건하지 못했다.” p.172 [7장 신앙]
도덕이라는 관념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초기 인간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하면서 생존의 필요 때문에 옳고 그름의 감각이 어렴풋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이 시기의 관심은 오로지 생존이었고, 생존이라는 유일한 목적이 그 필요의 한계를 규정했을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행위는 용인될 수 없었고 응분의 대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정한 행동 양식이 부족 안에서 규범으로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집단 전체에 적용되는 표준이 되어 윤리의 모테가 되었다. p.183 [8장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