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인간이 근본적으로 고결하다면, 해양 재난 시 남자는 항상 여자를 도와야 한다. 그러나 18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일어난 18건의 해양 재난에 대한 연구에서, 여성의 생존 가능성은 남성에 비해 약 절반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결과는 남성이 여성의 목숨을 구해 줄 때도 있지만 자신을 구하는 경향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선원의 생존율은 승객에 비해 더 높다. 선원들은 구명 뗏목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타닉호 는 위 연구에 등장하는 18건의 해양 재난 중에서 ‘여자와 아이들 먼저’라는 규칙을 실제로 따른 단 두 건의 사고 중 하나다. 이 사고에서 여성의 생존율은 70퍼센트였던 반면, 남성의 생존율은 20퍼센트에 불과했다. 타이타닉호를 특별하게 만든 해답은 불세출의 영웅 에드워드 스미스다. 빙산과 충돌한 직후, 스미스 선장은 선원들에게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선원들은 배를 탈출하는 내내 이 명령을 철저히 수행해서, 혼자 살려는 이기적인 남자들의 행위를 효과적으로 방지했다. 심지어 선원들이 구명정에 먼저 탑승하려던 남자에게 발포를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선원들이 ‘여자와 아이들 먼저’라는 규칙을 강요했기 때문에 이기적인 남자 승객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 - 본문 43쪽
궁극적으로, 훌륭한 DNA를 찾으려는 이 욕구는 짝짓기 게임 전체의 기반이 된다. 인간에게는 낭만적인 사랑이 필수적인 요소지만, 낭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동물에게는 낭만이 성생활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인간의 아기를 양육하려면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부모가 한 팀이 되어 함께 아이를 돌보는 것은 양육 과정의 성공을 보장하는 훌륭한 전략이다. 인간 고깃덩이 로봇인 우리의 DNA에는 섹스를 했던 상대와 함께 짝을 이뤄 그 일을 하도록 우리를 독려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욕구가 각인되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낭만적인 사랑을 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간의 유년기가 유독 길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이 이기적인 것처럼, 인간도 근본적으로 여전히 이기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적인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고도 좋은 짝이 될 수 있다. - 본문 85쪽
엄밀히 말해서 셸비와 내가 생명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난자와 정자는 융합하기 전부터 이미 살아 있었다. 샘은 부모, 조부모, 그 윗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생명의 사슬에서 다음 연결고리가 된다. 샘의 몸은 나와 비슷하고, 내 몸은 내 아버지와 비슷하다. 그러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이 비슷함은 작은 차이가 되고 그 작은 차이들이 점점 더 쌓여 가기 시작한다. 샘은 나를 거쳐, 빙하기의 수렵채집인, 4족 보행을 하는 영장류, 나무를 타는 다람쥐만 한 크기의 영장류, 선사시대의 파충류, 악어만 한 크기의 양서류, 고대 바다에 살았던 총기 어류, 그 전에 살았던 지렁이처럼 생긴 원생 어류를 거쳐 과거의 시간 속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이 사슬의 시작점, 즉 성 자체의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 대양에는 DNA가 들어 있는 단순한 주머니 하나만 떠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 주머니는 바로 생애 첫날의 샘처럼 장엄한 하나의 세포다. 이렇게 수십억 년의 시간을 거쳐 오는 동안, 바뀐 것이라고는 DNA 분자가 만들 수 있는 고깃덩이 로봇들뿐이다. DNA 자체는 이 모든 시간 동안 거의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 본문 88쪽
흡혈박쥐는 매일 피를 섭취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허탕을 치고 보금자리로 돌아오면 다른 흡혈박쥐에게 피를 구걸한다. 배고픈 박쥐는 다른 박쥐가 피를 게워 줄 때까지 이 박쥐 저 박쥐의 입을 핥으며 돌아다닌다. 흡혈박쥐의 프렌치 키스에서 대단히 놀라운 점은(프렌치 키스를 통해 피를 교환한다는 사실은 제외다), 친척이 아닌 개체들에게까지 이 방법으로 피를 나눠 준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모든 동물은 스크루지 같은 이기심의 지배를 받는다는 규칙이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먹이 나눔 방식은 그들이 영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흡혈박쥐는 자신을 도왔던 박쥐와 그렇지 않았던 박쥐를 기억한다. 만약 어떤 박쥐가 끈질기게 애원했는데도 먹이를 나눠 주지 않았다면, 무리의 다른 박쥐들은 그 박쥐에게 더 이상 피를 게워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 나눠 줌으로써 다음에 허탕을 쳤을 때 도움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이다. - 본문 101쪽
적혈구 속으로 벌레가 들어가는 게 별로 끔찍하지 않은 당신을 위해, 대자연은 당신이 마음껏 고를 수 있도록 인간 기생충 종합 선물세트를 준비해 두었다. 모두 저마다의 역겨움을 뽐내는 것들이다. 내게 가장 역겨운 기생생물은 하체를 기괴한 모양으로 부풀어 오르게 하는 상피병을 일으키는 사상충이다. 사상충은 모기의 침을 통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온 후에는 곧바로 림프관에 자리를 잡는다. 사상충은 일단 림프관을 발견하면, 면역계의 감지를 피해 최대 30년까지 그곳에서 숨어 지내면서 2.5~10센티미터 길이로 성장한다. 무려 30년 이다! - 본문 105쪽
인간에게 나타나는 이런 행동 변화가 톡소플라즈마에게 어떤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지는 않지만, 인간을 달라지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세계 여러 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적 차이의 원인이 톡소플라즈마라는 주장이 있다.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톡소플라즈마 감염률이 67퍼센트인 브라질은 감염률이 4.3퍼센트인 한국에 비해 ‘남자는 규칙을 경시하고 여자는 마음이 따뜻한’ 경향이 뚜렷하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주인을 어떻게 마음대로 조종하는지에 관한 농담을 좋아하지만, 고양이 기생충을 생각하면 그런 농담이 썩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 본문 121쪽
별개의 유기체인 임신부와 태아가 9개월 동안 하나의 몸을 공유한다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힘겨운 일이다. 이를테면, 임신부의 면역계와 태아의 면역계 사이의 긴장 상태가 동성애를 유발할 수 있다는 놀라운 결과도 있다. 아들을 계속 임신한 엄마의 면역계에서는 남성의 항체에 대해 점점 더 강력한 면역 반응이 발달한다. 이렇게 나중에 임신된 아들일수록 엄마의 면역계로부터 더 강한 공격을 받는다. 이 사실을 근거로 나중에 태어나는 아들일수록 동성애자가 되기 쉽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 때문에 동성애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동생이 형들보다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33퍼센트 높은 까닭은 엄마의 면역 반응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장남이 동성애자일 확률은 약 2퍼센트다. 차남은 2.7퍼센트이고, 여섯 번째 아들은 8.5퍼센트다. 이런 상관관계는 남성 동성애자에게만 적용되고, 여성 동성애자는 형제자매의 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 본문 123쪽
아카시아가 만드는 꽃꿀의 양은 초식동물에 대한 염려가 얼마나 큰지에 따라 달라진다. 1년에 걸쳐, 심지어 하루에 걸쳐서도, 식물은 가능한 한 적은 양의 꿀을 감질나게 주면서 방비를 보강하기 위해 개미가 필요한 곳에만 조금 더 꿀을 분비한다. 나무에 살 수 있는 개미의 개체 수는 그 나무의 변덕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비유를 하자면, 아카시아 나무는 공장을 지키는 경비원들에게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임금을 지불하는 악덕 백만장자인 셈이다. 어떤 경비원들은 침입자와 싸우다 죽고, 어떤 경비원들은 범죄율이 낮은 기간에 해고되어 굶어 죽는다. - 본문 139쪽
땃쥐는 아마 동물계에서 가장 대식가일 것이다. 물론 체중 1700킬로그램인 코끼리가 먹는 양이 체중 2그램인 땃쥐가 먹는 양보다는 당연히 훨씬 많다. 그러나 몸의 크기에 비해 먹는 양을 따져보면, 상황은 완전히 뒤집힌다. 하루에 대략 100킬로그램을 먹는 코끼리가 자기 체중의 약 6퍼센트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는 데 비해, 땃쥐는 하루에 체중의 384퍼센트를 먹은 기록이 있으며, 이에 견줄 수 있는 동물은 어디에도 없다. 포유류를 살펴보면, 몸집이 작을수록 단위 질량당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한다. 땃쥐는 크기가 가장 작은 포유류이기 때문에 식탐이 가장 많은 것이다. 만약 코끼리 한 마리의 무게와 맞먹을 만큼의 땃쥐가 모이면, 이 50만 마리의 땃쥐 무리는 코끼리 한 마리에 비해 64배나 많은 먹이를 먹어 치울 것이다. - 본문 155쪽
주머니날개박쥐의 일부다처제 체계에서 흥미로운 점은 모두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모리 포비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친부 확인 분석을 한 결과, 연구자들은 주머니날개박쥐의 추악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하렘의 수컷이 위성 수컷에 비해 더 많은 새끼 박쥐를 자식으로 두었지만, 하렘 수컷의 새끼 중 친자식의 비율은 겨우 30퍼센트에 불과했다! 나머지 70퍼센트는 근처의 위성 수컷과 다른 하렘 수컷의 자식이 섞여 있었다. - 본문 188쪽
우리는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인물을 따분한 천재라 치부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위험한 논리다. 일부 수컷들의 대안적인 짝짓기 전략을 보고 10대 자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해 보자. “네가 미식축구 선수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고 너의 매력이나 지성이나 유머 감각을 알아봐 주는 여자를 만나게 될 거야.” 참으로 다정한 말이긴 하지만, 자연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신은 10대 소년에게 미식축구 선수와 데이트하러 가는 여자를 납치해서 강간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나누고 있는 커플의 침대 속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여자 역할을 가로채서 미식축구 선수가 엉뚱한 곳에 사정을 하게 만들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을 수는 없다.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것은 좋지만,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는 지켜야 할 도덕이 있지만, 자연은 도덕적인 곳이 아니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결코 인간의 행동을 정의하는 데 활용할 수 없다. - 본문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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