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심성’의 일상화로 구현된 갑질 역시 마찬가지다. 갑질이 나쁘기만 했을까? 그랬다면 그게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기승을 부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갑질 역시 한국인의 전투성을 키워준 동력 중 하나였다. “갑질을 당하면서 느낀 모욕감은 내가 성장하는 데 비료가 되었다. 나 스스로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갑질을 당하는 것은 내가 약한 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증언이 말해주듯, 갑질을 당한 한국인 대부분은 자신이 당한 갑질을 성공을 위한 비료로 삼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심리적 토대에 여러 구조적 여건이 맞물리면서 우리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압축성장(condensed economicgrowth)’을 이룩했다.
--- p.33
참으로 놀라운 생각이다. 때릴 수 없어 무릎을 꿇렸고, 사회정의를 위해 그렇게 했다는 당당함이 말이다. 아니 놀랍다 못해 무섭다. A씨는 자신의 그런 정의로운 행위가 칭찬을 받기는커녕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에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사무실 바닥에 뒹군 게 아니었겠는가. 소통 절대 불능의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그러고 보니 조현아 역시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느냐”며 억울해했다. 그 역시 여승무원과 사무장을 무릎 꿇게 한 것이 정의, 아니면 적어도 ‘조직의 정의’를 위해서였다는 생각을 했을 법하다. 부천 현대백화점 모녀 갑질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만인 2015년 1월 5일 대구의 한 백화점에서 일어난 “백화점 점원 뺨 때린 ‘갑질녀’ 사건”의 장본인도 억울하다고 했다.
--- p.64~65
분신자살을 시도한 경비원 이 모 씨는 전신 3도 화상을 입어 한 달 만인 11월 7일 패혈증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이 비극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건일 뿐,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이 매일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대한민국 아파트는 또 하나의 노동착취 현장일 뿐만 아니라 인성을 메마르게 만드는 그 어떤 구조적 요인을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경비원에 대한 갑질은 그런 요인들의 총체적 반영으로 나타난 것일 뿐, 아파트라는 거주양식과 운영구조 자체가 대한민국을 ‘갑질 공화국’으로 만드는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 p.91~93
왜 그럴까?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 때문이다. 이계삼이 잘 지적했듯이, “한국 교육의 근원적인 불행이란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 외에는 다른 삶을 향한 출구가 이 사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즉, 교육은 누가 용이 될 것인가 하는 걸 가려내는 선발의 의미만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걸 귀신같이 꿰뚫고 있는 학부모가 자식의 전투력 강화에 일로 매진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원래 전쟁의 공포는 증폭되기 마련이다. “너 대학 못 가면 뭔 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와 같은 폭언은 비단〈말죽거리 잔혹사〉와 같은 영화 대사로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 각 가정의 일상에서 각종 변주를 거치며 수시로 만들어지는 말이다. --- p.122~123
기러기 아빠들의 이런 고백만큼 전쟁 같은 삶을 실감나게 말해주는 증언이 또 있을까. 도대체 누가 제도를 믿는단 말인가? 법도 못 믿는데 제도를 믿을 수 있겠는가? 기러기 아빠 신드롬은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과 이에 따라 불신의 소용돌이가 지배하는 각개약진 사회의 슬픈 자화상임이 틀림없다. 기러기 아빠 신드롬은 단지 드라마틱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신드롬’ 운운하는 딱지까지 얻게 된 것일 뿐, 대다수 한국인들의 삶이 용이 되기 위한 각개약진의 비장함과 처절성으로 점철된 것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 p.184
권력을 지닌 사람은 소수의 권력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권력의 주체는 나의 주변 사람들이거나 이름 없는 대중일 수도 있다. 그렇게 통속적으로 변질된 ‘인정’ 개념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공간이 바로 SNS다. 과거엔 자기 과시를 위해선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 했고, 또 적절한 타이밍을 잡는 노력이 필요했지만, SNS는 그런 번거로움을 일시에 해소시켜준 ‘혁명’이나 다를 바 없다. ‘인정욕구’에 굶주린 사람들이 SNS에 중독되지 않고 어찌 견뎌낼 수 있으랴. SNS가 ‘온라인 인정투쟁’의 장으로 활용되는 건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그 격렬함은 한국을 따라올 나라가 있을 것 같지 않다. 한국에서 페이스북이 ‘인맥 과시용 친구 숫자 늘리기’로 이용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허울뿐인 ‘먼 친구’가 유행하는 이유는 페이스북 이용자들 사이에서 자기과시를 위한 친구 추가 경쟁이 붙었기 때문이다. --- p.216
가장 충격적인 것은 기아자동차 노조 광주지부가 “차별과 착취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를 내걸었음에도 비정규직을 이용해 자기들의 배를 불린, 겉 다르고 속 다른 양두구육(羊頭狗肉)의 행태, 즉 비정규직을 상대로 사실상의 ‘인질극’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기아자동차의 한 부정입사자는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고개를 떨군 채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었다”고 했다. 2005년 1월 22일 분신을 기도했던 현대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최남선은 “우리도 정규직 드나드는 정문 앞에서 데모 한 번 하고 싶다”고 했다. 한 현장 활동가는 “비정규직들 사이에서는 ‘우리를 팔아먹지 말라’, ‘연대를 들먹이지 말라’는 격앙된 목소리도 적지 않다”고 했으며, 또 현대차의 한 정규직 조합원은 “비정규직 구호 속에 ‘정규직 때려잡고 비정규직 정규직화하자’는 게 있는데, 상대적 박탈감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 p.268
우리는 한국의 중앙집권체제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축복을 무시해선 안 될 것이다.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 1967~)가 혁신과 학습을 조장하는 데 도시가 가진 우위의 대표적 사례로 한국이 이룬 성공을 들었듯이, 우리는 서울 인구 집중이 이른바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를 낳아 서울을 위대한 혁신의 집합소로 만들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중앙집권체제의 그런 장점으로 우리의 현 서울-지방 문제를 은폐하거나 얼렁뚱땅 넘기려고 들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려 드는 사람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대도시가 제공하는 네트워크 효과엔 그만한 비용과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대도시의 인구 과밀(過密)은 주택·교통·환경 문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시형 노이로제’와 ‘공간축소 증후군’을 유발하는 등 사회적·육체적 병리 현상을 크게 증가시킨다.
--- p.284~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