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폭한 눈보라에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 버린, 잊지 못할 그날. 오슬로에서 전해온 급보에 그는 얼어붙은 스톡홀름을 지나 서둘러 돌아왔다. “그녀는?” 브룬틀란트 저택으로 돌아온 카일은 번들거리는 검은 가죽 장갑을 천천히 벗으며 수행비서에게 확인했다. 피 묻은 메스를 손에 든 외과 의사처럼 천천히 나직하게 확인한다. “그녀는?”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뒤를 쫓았지만 놓쳤습니다.” 수행비서가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는 그 모든 사건의 전말을 고한다. 카일은 몇 분도 되지 않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다. 정확히 세 시간만의 공백. 그 공백이 그와 그녀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사랑을. 고개 숙인 수행비서를 내려다보던 카일은 말없이 장승처럼 서 있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홱. 날카로운 장미의 가시가 박히듯 검은 가죽 장갑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붉게 긁힌 수행비서의 뺨에서 뚝뚝,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방심했던 것이. 용서하십시오. 실수였습니다.” 익히 그의 두려움을 알고 있기에 숨이 넘어가라 용서를 간청한다. 그의 자비를. 카일은 여전히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쫓듯이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에도 사락, 얼어붙은 그의 창가 너머로 검은 장막이 드리워지듯 하얀 눈송이가 사정없이 퍼붓고 있었다. 단단한 침묵이 흐르고 카일은 조용히 말했다. “나가.” 그의 간결한 지시에 수행비서는 서둘러 도망치듯이 카일의 침실을 빠져 나갔다. 탁, 소리와 함께 침실의 문이 닫힌 다음에도 죽은 듯한 정적만이 흘렀다. 광막한 적막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난폭한 불쏘시개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흡수한 듯한 고요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던 카일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너졌다. 그는 말없이 두 팔로 검은 실크와도 같은 머리를 감싼 채 차가운 바닥에 고개를 묻고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의 격렬한 멜로디는 멎을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