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남풍에 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 그녀가 서 있었다. 멀리서도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 저녁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도로도 집도 울타리도 모두 윤곽이 저녁 어둠에 가라앉는다. 그 안에서 희미하게 부각되어 오는 기척이 있었다. 마치 빛에 감싸여 있는, 신기한 물체와의 조우와도 같았다.
아키오는 멈춰 서서 눈을 모으고 그 발광체를 바라보았다. 아키오의 조금 앞에서 걷고 있던 카후도 목을 쭉 빼고 앞쪽을 바라본다. 그것이 사람임을 알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을 정도다. 아키오는 경계하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긴 머리의 여자다. 환하게 부각되어 보였던 것은 하얀 모자와 원피스 때문이었다. 관광객인가.
눈이 마주칠 정도로 가까워지자 아키오는 시선을 피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 뭐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아키오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녁 어둠 속에서 물방울 같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 pp.82~83
"얼마 안 되지만 이달치 월급..." 얼마 안 되기는커녕 그로서는 상당히 무리를 한 액수였다. 사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었는데, 정말 얼마 안 되지만..." "필요 없다니까요." 사양한다기보다는 거부에 가까웠다. 사치는 상 위의 봉투를 아키오 쪽으로 밀어냈다. "그런 생각으로 있는 거 아니에요. 난 음식도 청소도 빨래도 아무것도 안 했고." "하지만 가게 일도 도와주고..." "점원이 되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닌걸요."
순간 공기가 정지했다. 사치의 커다란 눈이 아키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넘칠 것처럼 글썽이고 있었다. 아키오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툇마루에 고개를 얹어놓은 카후의 킁, 하는 콧소리가 들렸다. 사치는 눈을 돌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안녕히 주무세요." 속삭이듯이 한마디 하고는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아키오는 상 위의 봉투를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불단 옆에 밀어놓은 재떨이를 잡아당겼다. 재떨이 안에는 핀으로 집어놓은 담뱃갑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금연'이라고 쓴 메모를 빼내고 그 뒷면에 '생활비'라고 써서 나비 모양의 머리핀에 봉투를 꽂아놓았다. 그것을 들고 부엌과 툇마루를 한동안 오락가락하다가 세면대 거울 앞에 살짝 놓았다.
다음날 아침 이를 닦으려고 칫솔과 치약을 집으려는데, 거기에 나비가 앉아 있었다. 'OK!!'라는 메모가 꽂혀 있다. 아키오는 치약을 쥔 채로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pp.150~151
"사치, 보물은 돌려놓았다더냐? 그럼 이제 됐느냐?"
'보물?'
아키오는 할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할머니, 보물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할머니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아키오를 보더니 갑자기 무서운 눈초리가 되어,
"이런 멍텅구리 같은 녀석!"
다짜고짜 호통이다.
"행복하게 해주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저쪽에서 오기를 기다리기만 할 거냐? 노상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영영 행복해지지 못할 거다"
그리고 다시 가물가물한 눈을 천천히 감았다.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