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있다. 주로 가설적 역사를 다루는 대체역사소설을 쓰다가 최근에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정통역사소설에 주력하고 있다. 역사에 흔적이 조밀하게 남아있는 소재도 즐겨 다루지만, 빈약한 기술 한두 줄만 사료로 남아있는 소재도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한다. 읽는 이로 하여금 역사의 내막을 알게 하고 그럼으로써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가능하면 교훈도 얻을 수 있게 하는 역사 스토리텔링 작업을 즐겁게 하고 있다. 그동안 펴낸 작품으로는 『대군으로 산다는 것』이 있다.
형님이라 불린 자의 이름은 정도전, 그를 형님이라 부른 자는 하륜이란 이름자를 썼다. 정도전의 허여를 받은 하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침묵하며 서로를 쏘아볼 때 방안에 가득했던 긴장감이 그의 웃음으로 다소 녹았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인연이 아니었습니까. 형님과 나 말입니다. 고금에 또 이런 인연이 있을까.” 하륜의 말에 듣는 이도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정도전은 하륜의 말을 듣고 그와 연관됐던 수많은 풍파를 떠올렸다. 그 가운데는 함께 겪은 것들도 있었고, 서로 반목하면서 생긴 것들도 있었다. --- p.7
“충. 그것만은 목줄에 칼이 들어올 때까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눈을 감을 때까지 지켜야 할 최후의 것이다.” “신하가 가장 위하여야 하는 것이 군입니까, 민입니까? 스승님께서 최후의 것을 충으로 짚으시니 스승님의 대답은 군일 것입니다. 허나 제자는 생각이 다릅니다. 신하가 최후까지 지녀야 할 것은 애입니다. 백성에 대한 사랑이 군주에 대한 충성보다 크고 숭고합니다.” 이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을 하고 정도전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도전의 눈에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 p.54
“고려는 살기 좋은 나라다. 감투들이 살기에 말이야. 그 중에서도 배알이 없고 쥐새끼 같은 감투들이 살기 좋은 나라다. 더럽고 썩은 내가 나고 제 배 채울 궁리만 하는 감투들이 살기 좋은 나라다!” 하륜은 이렇게 말하곤 멀쩡할 때에는 감히 입에 담을 상상도 하지 못하는 흉한 욕지거리를 마구 입에 담았다. 응어리진 울분의 표출이었다. 신몽인도 한숨을 쉬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쉭! 하고 화살 하나가 날아와 가마 팔걸이에 박혔다. 신몽인은 반사적으로 칼을 빼들었다. --- p.89
“관원이 무엇이냐.” 이제 자초는 또 선문답을 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이 질문은 방금 했던 질문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답하기 곤란했다. 하륜은 자초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를 몰라 대충 간단한 정의를 읊었다. “관원이란 관에 종사하여 국사를 돌보는 자들이지요.” 하지만 자초는 절대적 진리와도 같은 이 정의를 부정했다. “아니다. 틀렸다. 관원은 관에 종사하지만 국사를 돌보진 않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관원이 관에서 국사를 돌보지 않으면 뭘 돌본단 말입니까?” “국사가 아니라 민사(民事)다, 민사.” 하륜의 표정이 구겨졌다. “국사가 곧 민사가 아닙니까.” 이 말엔 자초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런 멍청한 인사를 보았나! 이런 놈을 두고 누가 재상감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