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심훈문학상을 수상했다. 《위작(僞作》, 《추사 이야기》, 《묵장(墨莊)》, 《아틀란티스》, 《페르시아》, 《갈마지 워쩌!》 등 여러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충남도정신문에 장편소설 《미소》를 연재하고 있다. 추사 스토리텔링 개발에 참여했고,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호는 청효(靑曉).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 세로로 한 자, 가로로 석자의 몽도원도(夢桃園圖)가 완성된 것이었다. 1447년 4월 23일의 일이었다. “그림 속에 사람이 없는 것은 대군께서 가야 할 길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보지 마십시오.” 안견의 속 깊은 말에 안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모르겠는가? 자네의 깊은 뜻을.” 안평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안견의 몽도원도를 무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29
한명회는 우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파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여긴 안심하십시오. 쥐도 새도 모릅니다. 미천한 무당의 집에 누가 엿듣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비파의 말에 그제야 한명회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해대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대군께서 부르시면 천명(天命)을 이야기하거라!” 한명회의 말에 비파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대군이시라면 안평대군을 말씀하시는지요?” 비파의 물음에 한명회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 눈에는 안평대군이 천하를 거머쥘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느냐?” 한명회의 물음에 비파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살살 흔들어댔다. --- p.93
“그대들은 모릅니다. 이 자리를 바라보는 숙부의 눈빛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보입니다. 칼을 품은 그 눈빛이.” 어린 임금은 말끝을 다 맺지 못하고 그만 흐느껴 울었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안절부절못했다. 어린 임금이 작정하고 내뱉는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안평 숙부에게 칼을 겨눈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 다음은 그 칼끝을 제게로 돌리겠지요. 이 어린 조카에게로 말입니다.” 눈물로 얼룩진 어린 임금의 얼굴은 그야말로 비극 그 자체였다. --- p.151~2
계유년 시월 십일, 세상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바람도 스산하게 불어대고 있었다. “대감, 하늘이 내리신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윤씨 부인의 눈이 당차게 수양을 올려다보았다. 두 손은 수양의 갑옷 끈에 가 있었다. “이미 정해진 일이오. 오늘 밤만 지나면 세상은 바뀌어 있을 것이오.” 수양의 두 눈은 화톳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입술은 태산을 머금은 듯했다. “가십시오. 이제 가서 호랑이 사냥을 하십시오.” 윤씨 부인은 갑옷을 어루만지며 수양을 보냈다. “다녀오리다.” 수양은 무겁게 한마디 내뱉고는 명례궁 안뜰로 내려섰다. --- p.159~60
“저들이 먼저 움직일 줄은 몰랐다. 실수로다. 실수로다!” 안평은 거듭 탄식을 흘려댔다. “대군, 이제 일은 벌어졌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현로의 말에 안평이 귀를 세웠다. “무엇인가, 그것이?” “우상 대감을 찾아가 관찰사들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충청도 관찰사 안완경이야 소식을 전하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올 것이고, 전라도나 경상도도 대군의 소식과 함께 우상이 설득한다면 협조할 것입니다.” 이현로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방군이 오기를 기다려 정면승부를 걸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평은 달랐다. 군막을 서성이는 것이 스스로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것은 어떤가?” --- p.223
안평은 검을 들어 등적을 찌르려 다가섰다. 그 순간 무홍이 몸을 돌리며 검을 든 안평의 팔을 내리쳤다. 다시 한 번 맑은 쇳소리가 대청마루를 울리고 이번에는 안평이 쓰러졌다. 쓰러진 안평의 소맷자락으로 피꽃이 화 하니 피어올랐다. “네 놈이.” 안평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무홍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이제 아셨습니까? 이 몸이 내금위 소속 설검이었다는 것을 아셨으면 한 번쯤 의심을 하셨어야지요. 그런 허술함 때문에 대군은 아니 되시는 겁니다.” 정중하다 못해 비아냥거리는 무홍의 말에 안평이 이를 갈았다. --- p.263
교동도의 날씨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바닷바람이 때 아니게 차가워졌다. “어명이오, 죄인 안평은 나와 어명을 받들도록 하라!” 의금부 진무 이순백의 외침에 안평은 밖으로 나섰다. 쪽빛 바다가 마당까지 밀려 들어와 있었다. 안평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가까이 다가선 바다를 무심한 얼굴로 내다보았다. 마당에는 사약이 준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