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서3팀 김수빈 (shuubiny24@yes24.com)
대학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3사 방송국의 드라마를 모두 챙겨보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같이 현실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여자 주인공에게 나를 대입하여 대리만족을 느끼고,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때가 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TV속에 나오는 번듯한 직장인 (그것이 남들은 몇 년씩 준비해도 힘들다는 변호사 혹은 의사와 같은 전문직일지라도) 여자 주인공은 모두 20대 중반, 아주 가끔 후반으로 설정되어 있다. 실제로 20대 후반에 그런 비범한 인생 경험을 할 수 있는 여자는 몇 명이나 될까? 대학 졸업하고 취직 준비하고, 젊은 실장님과 러브라인을 만들 새도 없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다 보면 원래 있던 인간관계 조차 유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한창 꿈을 키울 이십대 초반에 드라마에 빠져 살았으니, 당연히 나의 서른은 어마어마할 거라고 상상해왔던 것이다.
' 스물아홉에서 서른, 고작 앞자리 숫자 하나 바뀌는 걸로 왜 자존감 100퍼센트에 똑순이었던 나와 내 친구들은 갑자기 이렇게 후지게 구는걸까.
스물아홉 12월 31일까지만 해도 너무나 씩씩하게 잘 먹고 잘 살았던 우리는 달력 한 장이 넘어가 서른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인생에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둥 생전 안하던 신세타령, 몸 아픈 타령, 남자 타령 등으로 유난스럽게 굴며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다.'
올해 갓 서른이 된 나는 위 구절을 읽는 순간, 내 마음속 깊은 곳 감춰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쪼그라든 자존감을 들킨 것 같아 매우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서른을 맞이하기까지 다양한 도전과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저자와 달리, 나의 서른 준비기는 매우 위태로웠다. 실제 아홉수가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9살, 19살, 29살…..99살.. 은 모두 재수가 없는 거냐며 개의치 않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스물 아홉의 1년은 혹독했다. 이유 없이 몸이 붓고 체력이 떨어져 매일 아침 눈 뜨는 순간부터 ‘아, 너무 힘들다’라는 생각을 하고 보냈던 하루하루, 의욕 없이 눈에 닥치는 일만 겨우겨우 해치우며 흘려 보낸 직장에서의 시간, 짜증과 예민함으로 한껏 날카로워진 심리상태까지. 차라리 아홉수라는 것이 실제로 있어서, 이 시기가 지나가면 모든 게 나아질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희망적일 정도였다.
하지만 결론은 똑같다. 미리 충분한 준비를 했든 혹은 준비 없이 서른이라는 나이에 놓여졌든 간에, 어릴 적 어렴풋이 정해놓았던 인생의 큰 변화의 정점에 있던 서른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사회적 통념상 여자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는 결혼이기에 예로 들어보면, 서른이라는 나이의 무게감에 짓눌려 그 전에는 무조건 결혼을 해야겠다는 친구들, 내 주변에도 많다. 이런 친구들이 한 두명씩 (솔직히 한 두명이 아니긴 하다..) 결혼 소식을 알려올 때마다 ‘나는 아직 결혼할 생각도, 자격도 없는데. 나만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도 되는걸까’ 라는 의문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결론은 똑같다. 남들의 속도에 발맞춰 무리해서 살다 보면, 분명 후회하고 아쉬움 가득한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행복하기에는 조금 이를지라도, 적어도 내게 있어 행복이 무엇인지는 알만한 나이이지 않은가.
몇 년 전부터 드라마를 끊었다. 비록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인생을 누군가 만들어낸 TV 속 여주인공과 비교하며 우울해 하지는 않는다.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미스코리아와 아나운서의 직업을 가진 저자 역시 이십대를 우리와 똑같이 일에 치이고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며, 사랑에 울고 웃으며 보냈다고 한다. 마치 친언니와도 같이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서현진이라는 한 여자의 고백을 통해 지난 날의 나를 위로하고 앞으로의 날들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