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첫사랑은 정동에서 시작되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 본부가 정동에 있었고, 최초의 교회와 근대적 학교, 병원이 정동에서 문을 열었다. 정동제일교회와 새문안교회의 말씀은 우리의 영을,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경신학교의 가르침과 시병원과 보구여관의 의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보듬어 주었다.---‘눈 덮인 예배당에서 처음 사랑을 노래하다’(정동제일교회)
성당 왼편에 새로 지은 성당이 있다. 옛 성당이 평생 고향을 지킨 시골 할아버지라면 새 성당은 도시에서 내려와 집짓고 사는 부잣집 주인 같다. 새 성당을 지으면서 하마터면 옛 성당을 허물 뻔했다고 한다. 역사가 오랜 교회들의 한결같은 고민은 낡은 성전을 수리하고 보수하는 일이다. 온수리성당도 같은 문제로 걱정했다. “성당을 헐고 새 성당을 짓자”, “성당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으니 그 전에 빨리 헐어 버리자”는 의견이 분분했다. 성당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못 하나 박는 것까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잘 차려진 백 년의 추억’(성공회 온수리성당)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성결교단 전신인 동양선교회 토마스 감독이 일본 경찰에 구타를 당한 것이다. 영국 출신으로 1910년 내한해 경성성서학원 원장과 감독을 겸하던 그가 강경성결교회 형편을 살피러 내려왔는데, 만세 시위를 지원하러 온 줄로 오해받은 것이다. 이 사건은 영국과 일본의 외교 문제로 확대됐다. 총독부는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1923년 토마스 감독의 매 값으로 교회 건축을 시작했고, 다음 해 9월 봉헌예배를 드렸다. 전화위복으로 예배당이 건축되고부터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감독이 일본 경찰에게 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역 주민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따뜻해졌다.--- ‘문이 닫혀 있는 교회’(강경북옥교회)
금산교회 강단은 남자석을 향하고 있어 휘장을 쳤을 때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설교자조차 여성도들을 볼 수 없다. 반면 두동교회 강단은 남녀석 중간을 향하도록 해서 강단 앞 팔각기둥과 건물 안쪽 모서리에 휘장을 쳐 남녀 신도는 서로 볼 수 없더라도 설교자는 양쪽을 다 볼 수 있도록 했다. 남녀를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 건축물에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금산교회와 두동교회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두 교회 건축 시기에 21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908년은 남녀가 엄격하게 구별되던 시절이었고, 1929년은 휘장을 철거하는 시대였다. 전북 문화재 전문가들은 “남녀유별의 유교 전통이 무너져 가는 1920년대에 ㄱ자형 건물을 통해 남녀칠세부동석, 남녀유별의 전통을 보여 주며 남녀 모두에게 신앙을 전파하려 했던 독창성이 돋보인다”고 평한다.--- ‘공평한 ㄱ자 예배당’(두동교회)
김종숙의 열심 있는 전도와 교육 열정에 힘입어 척곡교회는 봉화 지역에서 유력한 교회로 부상했다. 대부분의 지역 주민은 명동서숙에서 공부했고, 주일이면 120명이 모여 예배드릴 만큼 교회가 부흥했다. 그러나 김종숙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에 앞장섰으며, 독립운동가들을 숨겨 준 것이 발각되면서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
“우리 할아버지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목사가 된 최초의 사람입니다. 할아버지는 봉화경찰서로 가서 경찰서장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칠 만큼 강단 있는 분이셨지요” (…)
대한제국 관리였던 김종숙은 을사늑약 이후에 처가가 있는 봉화로 내려와 척곡교회와 명동서숙을 설립했고, 그의 아들 김운학은 척곡교회 1대 면려회 회장이었다. 김운학은 죽기 전에 아들 김영성에게 척곡교회를 부탁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을 뿌리칠 수 없었던 김영성 장로는 교장 퇴임 후 척곡에 내려와 교회를 지키고 있다. 그가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깊은 산속에 묻혀 백 년의 소리를 담다’(척곡교회
독자들은 특별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만남’의 흔적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다음 세 가지 만남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 사진과 글의 만남이다. 이 책은 화보이며 동시에 교회사 책이다. 소명감으로 셔터를 누른 사진작가의 작품과 문서 자료와 현장 유적을 꼼꼼하게 따져 가며 기록한 젊은 교회사가의 글이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이 책은 먼저 현장을 답사하듯 사진을 죽 훑어본 다음, 안내자의 해설을 듣는 것처럼 글을 읽으면 좋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진을 보면 글과 이미지가 주고받는 대화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복음과 역사의 만남이다. 이 책에 소개된 예배당들은 백 년을 넘거나 그에 가까운 역사를 간직한 교회들이다. 한말 개화기에 복음을 접한 1세대 신앙인들의 감격과 헌신,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2세대 신앙인들의 고난과 투쟁, 그리고 해방 후 격동의 현대사를 살았던 3세대의 절망과 도전의 역사를 말없이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흠집을 찾아내려 따지듯 달려들기보다는 여유로운 호기심을 갖고 살펴볼 때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기독교와 문화의 만남이다. 신학자 틸리히의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는 말처럼, 어떤 종교든 문화를 통하지 않고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으며 모든 문화는 그 안에 정신적, 종교적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다. 기독교문화도 마찬가지여서 시대와 민족에 따라 다양한 색깔의 문화가 만들어졌다. 내용에서 같지만 유럽의 기독교문화와 아시아의 기독교문화가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한민족 고유의 문화를 빌려 자신을 표현하면서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기독교문화가 창조되었고, 그것은 서구 기독교문화나 한국 고유문화와 ‘연결되면서도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예배당들이 구체적인 증거물이다. 특히 아름다운 곡선의 한옥 예배당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교회가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다._이덕주(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감수자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