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두 자녀와 미국 미시간 주에 살고 있다. 시카고 무디 신학대학원(Moody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성서연구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동 대학원 목회학 석사과정(MDiv.)으로 전환하여 영성 형성과 제자 훈련(Spiritual Formation and Discipleship)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이 책은 참으로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하나님과의 친교와 동행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쓰일 만한 책이다. 불행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냉담해지기 쉬운 영혼을 우리 하나님은 파괴된 도자기 조각을 다시 모아 이어 붙이는 도공의 섬세함으로 한 땀 한 땀 기우신다. 마침내 상처 입은 나오미의 영혼 역시 치료하신다. --- p.8
룻기를 묵상하는 여정이 진실로 ‘옛 땅을 밟아 보는’ 도보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저는 히브리어 성경을 참고하며 한 문장씩 룻기를 읽으면서 글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끊임없이 격려해 주셔서 힘겨운 여정을 ‘맨발’로 걸어가며 베들레헴의 흙을 밟을 수 있는 기쁨까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기쁨은 편안하게 최종 목적지인 베들레헴까지 태워다 줄 수레의 유혹을 끊어 버릴 만큼 충만했습니다. --- p.13-15
내레이터는 엘리멜렉의 식구들 이름을 차례로 소개한 뒤에 조용히 강조합니다. 그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이었다고. 에브라임은 베들레헴의 또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레이터는 그들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방 땅인 모압으로 떠났던 그들의 뿌리는 에브라임,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무슨 이유로 모압을 선택했는지는 전혀 기술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근’만이 배경이 되어 잔잔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근이 들었다지만 에브라임 사람인 엘리멜렉에게 모압이라는 선택이 쉬웠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딸과의 근칭상간으로 얻은 자손이므로(창 19:30-38)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족속을 경시해 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모압의 영토를 통과하려고 하였으나 모압은 끝끝내 허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몹시 탄압했습니다(민 22-24). …먼 역사를 떠올릴 필요 없이 룻기의 배경인 사사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면서까지 모압에게 억압받았음을(삿 3:15-30) 엘리멜렉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고향을 등지고 모압 땅을 선택했다는 것은 어쩌면 베들레헴에서 겪었던 시련과 갈등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 p.32-33
자, 볼까요? 한글 번역본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룻기의 내레이터는 4절을 좀 특별하고 재미있는 히브리어 동사로 시작합니다. “힌네(hinn?h)!!” 하고요. ‘힌네’는 청중의 눈길을 끌기 위해 강조할 때 쓰이는, 감탄사에 가까운 동사입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보라!” 혹은 “어머, 이것 좀 보세요” 정도의 표현이라 보면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힌네’로 문장을 시작하면 이야기의 반전이나 강조라고 보셔도 거의 틀리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이렇게 시작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야곱과 레아의 혼인 장면에서도 “힌네!” 하고 재미있게 쓰였습니다. --- p.118
나오미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이 밭 저 밭 기웃거리다가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채 신세를 한탄하면서 터덜터덜 걸어오면 어쩌나… 마음이 불안해지던 차에 저 멀리 걸어오는 룻이 보입니다. 어? 그런데 정말 룻이 맞습니까? 분명 빈손으로 나갔는데, 이제 손이 비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나오미는 믿기지 않아 눈을 한번 비벼 봅니다. 자신은 비어서 들어왔던 떡집 베들레헴인데(1:21), 집으로 돌아오는 룻의 손에는 풍족함이 있어 보입니다. 룻의 내레이터는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지만, 저는 여기서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룻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서 나오미는 ‘비어 있는’ 집을 박차고 룻을 향해 거의 달리다시피 다가갔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룻이 무겁게 들고 오는 보릿자루를 맞들어 주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것만 같습니다. 행복했을 겁니다. 베들레헴에서 다시는 고개를 못 들고 살 것 같았는데, 룻과 보릿자루를 맞드는 순간 어깨에 힘이 실리고 당당해지는 것을 나오미는 느꼈을 겁니다. 시어머니와 자부가, 아니 두 모녀가 함께 들어와 보릿자루를 놓는 순간, 나오미의 집은 비로소 ‘베들레헴(떡이 있는 집)’이 됩니다. 풍성합니다. 나오미는 ‘마라’가 아닙니다. 이제 그녀의 이름처럼 ‘기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