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보브 패트릭은 우연한 기회에 컴퓨터 프로그래머 양성교육에 참석함으로써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프로그램은 낭만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골치 아픈 것이었다. 어셈블리 코드의 길이는 점점 길어만 가고, 그에 따라 에러와 버그도 늘어만 가고, 결국은 이를 디버깅하기 위한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패트릭은 스피드코딩(speed coding)이라는 선구적인 컴퓨터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언어는 IBM의 젊은 설계사 존 배커스가 701에 쓰기 위해 개발하여 무료로 준 것이다. 스피드코딩은 일종의 언어번역기로 단순화된 명령어로 작성된 프로그램을 직접 실행할 수 있는 기계어로 번역해 주는 소프트웨어였다. 두 수를 더하는 네 개의 명령어가 필요하던 어셈블리어와는 달리 하나의 의사명령으로 똑같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프로그래머들은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스피드코딩이 주기억장치의 절반을 차지할 뿐 아니라, 실행시간이 최고 15배까지 늦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것이 디버깅 시간 등을 감안하면 더욱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결국 가장 유능한 프로그래머로 통하게 되었다.
1955년 11월 IBM사용자 모임인 SHARE에서 새로운 운영체제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노스 아메리카 항공사에 근무하는 오웬 모크라는 엔지니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IBM이 704을 발표하자 그는 GM에서 704를 연구하는 팀에 참여했다. 그는 704를 다루는 방법을 연구하는 동시에 그 동안의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최초의 운영체제(OS)에 대한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SHARE에서의 모임이 있은 뒤 14개월 뒤 3단계 오퍼레이팅 시스템이라고 이름 붙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다. GM-NAA I/O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하나로 통합된 프로그램패키지로서, 모니터라고 부르는 일단의 감시 명령군의 통제아래 3부분-입력, 실행, 출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프로그램덕분에 일괄처리라는 말에 적합한 컴퓨터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의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다. IBM은 704의 성능을 그 이전의 701보다 2배정도 빠르다고 선전을 했지만 3단계 오퍼레이팅시스템을 갖춘 GM의 704는 701보다 무려 20배의 성능을 나타낸 것이다. 당시에는 소프트웨어를 상품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배포된 지 몇 달만에 704의 대부분의 시스템의 사용하게 되었다.
1956년 704 후속타에 쓰일 운영체제를 설계할 SHARE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57년 1월 IBM은 공식적으로 후속타인 709를 발표하면서, SHARE 위원회로부터 SHARE 운영체제(OS)의 개발을 위임받게 되었다. 그리고 SOS는 스피드코딩을 개발한 존 배커스가 이끄는 소프트웨어 설계팀에도 큰 힘이 되었다. 배커스는 과학기술계를 겨냥한 FORTRAN을 설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IBM이 컴퓨터 업계에서 여전히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에 7난장이로 불리운 회사중의 하나인 버로즈사가 1961년 5000시리즈에 쓰기 시작한 다중프로그래밍 기술이 등장한다.
이전의 컴퓨터가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 시간에 하나의 작업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5000은 MCP(Master Control Program)로 알려진 운영체제의 감시하에서 같은 시간에 하나의 주기억장치를 여러 작업 프로그램들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효율을 급속히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실요화하기에는 주변의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 p.122~123
1946년 최초의 아날로그 계산기인 애니악이 개발된 이후 컴퓨터는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1969년 인텔은 현재의 인텔의 신화를 창조하는 첫걸음이 되는 4004를 개발한다. 이 칩은 인텔의 엔지니어인 테드 호프(Ted Hoff)와 페테리코 파긴(Federico Fagine)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후에 당시 computer-on-a-chip이라는 애칭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 칩은 잘 만들어진 탁상용 계산기에 쓰이는 정도 이상은 아니었다.
1969년 여름, 일본의 전자계산기 생산업체인 비지컴(Busicom)의 대표단이 대형 컴퓨터용 메모리 칩을 생산하는 미국의 인텔(Intel) 간부들과 캘리포니아에서 만났다. 비지컴은 새로운 계열의 업무, 과학용 전자계산기를 만들기로 결정했고, 이 신제품의 요체가 되는 전자부품을 인텔에서 공급해 줄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인텔은 집적회로 분야의 선두주자로서, 얼마 전 수백 개의 트랜지스터와 그밖의 전자부품들은 이들을 연결하는 전선을 소형 실리콘웨이퍼 위에 설치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인텔은 2천여 개의 트랜지스터를 담은 획기적인 집적회로(IC)를 이제 막 생산한 터였다. 비지컴은 이 놀라운 소형화 기술을 메모리뿐만 아니라 다른 회로들에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새 전자계산기를 위해 IC를 생산하도록 인텔을 설득했다. 인텔도 이를 수락했다.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조차 깜짝 놀랐다. 인텔이 컴퓨터 이용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이제 컴퓨터가 활용될 수 있는 그 광대무변한 공간을 감히 헤아려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인텔의 엔지니어들은 컴퓨터의 핵심 직접회로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발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칩 위에 얹힌 CPU였다.
처음에는 인텔 안에서도 이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간편한 계산기의 제작이라는 당초 설계의도를 넘어서서 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채 10년도 못 되어, 빈틈없이 설계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후예들이 사회 곳곳에 파고들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계산기 논리엔진으로뿐만 아니라 신호등 통제장치로도 쓰였다. 사람들이 늘상 쓰는 가전제품 - 제봉틀,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에도 등장하여 거의 모든 사람을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탈바꿈시켰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발명된 지 20년이 채 못 되어 장난감은 컴퓨터 두뇌를 얻게 되었다. 가령 인형이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한다든지, 저녁이 되어 쌀쌀해지면 스웨터를 입혀 달라든지, 하기에 이르렀다. 대형 컴퓨터에 못지 않은 정교한 기능을 제공해주는 운영체제의 발달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전에 힘입어,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인텔이 최초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생산했을 때 시판되고 있던, 가장 큰 대형 컴퓨터보다, 성능이 뛰어나고 다양한 탁상용 컴퓨터를 탄생시켰다.
컴퓨터는 더 이상 돈 많고 힘있는 회사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몇 만 원만 있어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대기업들이 사용하는 숫자를 빨리 처리해 주는 거대한 기계덩어리에 불과 했다. 그러나 1961년 영국의 섬록 컴프토미터(Sumlock Comptometer)사는 전자계산기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다. 이 계산기가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 Texas Instrument)와 그밖의 회사들이 내놓은 계산기들은 모두 기계식계산기의 기어를 임시기억장소와 영구적인 전선 논리회로로 만들었다.
비지컴은 각각 특정한 용도를 갖는 일련의 계산기들에 대한 전체 계획을 가지고 인텔에 접근했다. 인텔은 당시에 2천 개의 트랜지스터를 하나의 IC에 집적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인텔은 이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마시언 호프(Marcian E. Hoff)라는 유능하고 젊은 설계사를 비지컴 계획에 투입했다. 동료들 사이에 테드로 불린 그는 비지컴의 계획이 인텔의 기술에 비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계산기의 각 기능을 별도의 칩으로 구성하는 대신에 이를 하나의 칩으로 집적하는 데에 생각이 이르게 되었다. 이 IC는 2천 개 미만의 트랜지스터를 포함함으로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실질적으로는 대형컴퓨터의 중앙처리 장치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또 2천 개의 숫자는 인텔로서 가능한 숫자였다. 그리고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이름도 테드와 그 동료 연구원들이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본래 비지컴의 설계에 따르면, 하나의 계산기에는 매우 복잡한 10여 개의 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테드의 계획에 의하면 테드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3개의 칩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은 이를 통해 회로 설계와 디자인을 더욱 간편하고 산뜻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의 테드의 연구원들은 테드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으나 1969년 늦여름 테드의 계획이 한결 융통성이 있고, 경제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70년 인텔은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4004를 공개했다. 이러한 이름을 지은 이유는 이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데이타를 4비트 단위의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비지컴은 그러나 오늘날의 전자계산기에 비하면 매우 불편했다. 즉 입력에서 출력까지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 알고리즘을 입력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이전의 그 어떤 컴퓨터보다 매우 단순해 이에 대한 불평은 거의 없었다.
--- p.137~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