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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록 (큰글자책)
[도서] 서유록 (큰글자책)
이승희 저/한길로 역 지만지한국문학
41,000
서유록 (큰글자책)

책소개

목차

서(序)

공자 2464년 계축(癸丑, 1913) 음력 12월 초2일 계미(癸未)
12월 3일 갑신(甲申)
12월 4일 을유(乙酉)
12월 6일 정해(丁亥)
12월 8일 기축(己丑)
12월 9일 경인(庚寅)
12월 10일 신묘(辛卯)
12월 11일 임진(壬辰)
12월 12일 계사(癸巳)
12월 13일 갑오(甲午)
12월 14일 을미(乙未)
12월 15일 병신(丙申)
12월 16일 정유(丁酉)
12월 19일 경자(庚子)
12월 20일 신축(辛丑)
12월 21일 임인(壬寅)
12월 22일 계묘(癸卯)
12월 23일 갑진(甲辰)
12월 24일 을사(乙巳)
12월 25일 병오(丙午)
12월 26일 정미(丁未)
12월 27일 무신(戊申)
12월 28일 기유(己酉)
12월 29일 경술(庚戌)
12월 30일 신해(辛亥)
갑인(1914) 초하루 임자(壬子)
1월 2일 계축(癸丑)
1월 3일 갑인(甲寅)
1월 4일 을묘(乙卯)
1월 5일 병진(丙辰)
1월 7일 무오(戊午)
1월 8일 기미(己未)
1월 초 9일 경신(庚申)
1월 10일 신유(辛酉)
1월 11일 임술(壬戌)
1월 12일 계해(癸亥)
1월 13일 갑자(甲子)
1월 14일 을축(乙丑)
1월 15일 병인(丙寅)
1월 16일 정묘(丁卯)
1월 17일 무진(戊辰)
1월 18일 기사(己巳)
1월 19일 경오(庚午)
1월 21일 임신(壬申)
1월 22일 계유(癸酉)
1월 23일 갑술(甲戌)
1월 24일 을해(乙亥)
1월 25일 병자(丙子)
1월 26일 정축(丁丑)
1월 27일 무인(戊寅)
1월 28일 기묘(己卯)
1월 29일 경진(庚辰)
1월 30일 신사(辛巳)
2월 초 1일 임오(壬午)
2월 2일 계미(癸未)
2월 3일 갑신(甲申)
2월 4일 을유(乙酉)
2월 5일 병술(丙戌)
2월 초 6일 정해(丁亥)
2월 7일 무자(戊子)
2월 8일 기축(己丑)
2월 9일 경인(庚寅)
2월 10일 신묘(辛卯)
2월 11일 임진(壬辰)
2월 12일 계사(癸巳)
2월 13일 갑오(甲午)
2월 14일 을미(乙未)
2월 15일 병신(丙申)
2월 16일 정유(丁酉)
2월 17일 무술(戊戌)
2월 18일 기해(己亥)
2월 19일 경자(庚子)
2월 20일 신축(辛丑)
2월 21일 임인(壬寅)
2월 22일 계묘(癸卯)
2월 23일 갑진(甲辰)
2월 24일 을사(乙巳)
2월 25일 병오(丙午)
2월 26일 정미(丁未)
2월 27일 무신(戊申)
2월 28일 기유(己酉)
2월 29일 경술(庚戌)
2월 30일 신해(辛亥)
3월 초하루 임자(壬子)
3월 2일 계축(癸丑)
3월 초 3일 갑인(甲寅)
3월 4일 을묘(乙卯)
3월 5일 병진(丙辰)
3월 6일 정사(丁巳)
3월 7일 무오(戊午)
3월 8일 을미(乙未)
3월 9일 경신(庚申)
3월 초 10일 신유(辛酉)
3월 11일 임술(壬戌)
3월 12일 계해(癸亥)
3월 13일 갑자(甲子)
3월 14일 을축(乙丑)
3월 15일 병인(丙寅)
3월 16일 정묘(丁卯)
3월 17일 무진(戊辰)
3월 18일 기사(己巳)
3월 19일 경오(庚午)
3월 20일 신미(辛未)
3월 21일 임신(壬申)
3월 22일 계유(癸酉)
3월 24일 을해(乙亥)
3월 25일 병자(丙子)
3월 26일 정축(丁丑)
3월 27일 무인(戊寅)
3월 28일 기묘(己卯)
3월 29일 경진(庚辰)
4월 초 하루 신사(辛巳)

원문
일자별 여정 및 주요 활동
참고문헌

해설
옮긴이 후기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저자 소개 2

李承熙

이승희(李承熙, 1847∼1916)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퇴계학을 계승한 근대기 성리학자다. 성주 출생으로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계도(啓道), 호는 강재(剛齋)·대계(大溪)다. 1909년 북만주 한흥동에서 개척 사업에 진력할 때, 대하(大夏)로 개명하고 한계(韓溪)로 개호했다. 부친이자 스승인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받고 이를 발전·계승하고자 전념하던 그의 삶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계기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환된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 등의 문인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했다. 또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이승희(李承熙, 1847∼1916)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퇴계학을 계승한 근대기 성리학자다. 성주 출생으로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계도(啓道), 호는 강재(剛齋)·대계(大溪)다. 1909년 북만주 한흥동에서 개척 사업에 진력할 때, 대하(大夏)로 개명하고 한계(韓溪)로 개호했다.
부친이자 스승인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받고 이를 발전·계승하고자 전념하던 그의 삶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계기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환된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 등의 문인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했다. 또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수백의 유생을 대표하는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오적의 목을 베고 조약의 파기하라’는 내용의 상소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직접 들고 상경했다. 그러나 일경의 방해로 결국 성사하지 못했고 오히려 대구 경찰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그의 투쟁은 옥중에서도 계속되었다. 다음 해 4월 석방되었지만 끊임없는 일경의 감시가 이어지자 그는 국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이사이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성주 지역의 회장이 되어 활동했으며,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서한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했다.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자 62세의 노유 이승희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게 된다. 이곳에서 이상설·안중근·유인석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기지 및 한인 공동체 건설을 구상했다. 이윽고 1909년, 중·러 국경 지대에 위치한 밀산현 봉밀산을 기지로 낙점해 100여 가구를 정착시키고, 그곳을 한국을 다시 일으킨다는 의미의 ‘한흥동(韓興洞)’이라 명명했다. 운영 방식 및 자금에 대한 문제, 또 지리적 위치 등을 이유로 부득이 그곳을 나오게 된 그는 1913년 이미 안동에 정착하고 있던 동전 맹보순·대눌 노상익 형제·수파 안효제와 같은 선비 동지들과 결합해 동삼성 한인 공교회를 창설하고, 중국 공교회와의 합작을 통해 시국의 난관을 돌파하려 했다. 그렇게 북경으로 떠나 지회 승인에 성공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현실을 확인한 그는 1914년 결국 봉천(현 선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덕흥보라는 곳에 터(약 56만여 평으로 여의도의 3분의 2 면적)를 잡고 독자적인 또 본격적인 유교 공동체 겸 독립운동 기지 구축 사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해빙으로 인해 농장이 수몰되면서 계획은 시작과 동시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생계의 모든 것을 팔고 이곳에 모인 유림과 농민들은 이 일을 계기로 급격히 흩어지기 시작했고 한인 공교회도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1년 뒤인 1916년 2월, 그는 70여 년의 생을 이역의 일승잔(日昇棧)이란 한 여관에서 마감하게 된다. 이렇게 약 9년간 이어진 그의 해외 독립운동도 종료되었다. 1977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두 아들 이기원(李基元, 1885∼1982)과 이기인(李基仁, 1895∼1981) 역시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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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 시절 철학을 전공했고 대학원 진학 후, 한문학을 전공해 〈1910~20년대 재중(在中) 지식인의 한문학 연구〉(2020)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 한일청년학생포럼 한국위원회 실무책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해외구술자료사업 〈두 개의 ‘이름’을 통해 보는 ‘재일조선인’의 역사〉 연구책임자, 중국인민대학교 방문학자, 동국대학 강사 등을 지냈다. 현재 길림대학 한국(조선)어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한인문학회 편집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청구야담》을 번역(공역)했고 〈한계 이승희의 한시에 나타난 도해 전후 시정의 전개〉, 〈장석영의 러시아 체험을 통해 본 근대기 중화사상의 일면〉, 〈1910년대 지방 유림의 중국 이주 과정과 귀향의 동인 고찰〉, 〈1910년대 중국 심양 이주 한인의 삶과 문학〉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길림성 성도(省都) 장춘에 위치한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며 근대 한문학, 근대 중국 기행문, 이산문학 등에 관심을 경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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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5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40쪽 | 128*188*16mm
ISBN13
9791143024138

책 속으로

나 승희는 한국의 남쪽 강역에서 태어나 고래마냥 헤엄치듯 이리저리 떠다니며 자라다 이내 늙어 버렸다. 하나 이미 몸을 천지에 의탁했기에, 세상에 대한 이상이 없을 수 없었다. 또 아버지 겸 스승의 가르침과 은혜를 입어, 요순·주공(周公)·공자(孔子)의 책을 읽었기에 그 마음은 항상 ‘중화(中華)’에 있었다. 만년에 난세를 만나 망령되이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나온 뜻을 숭모하다 예순둘이 되던 무신년(1908), 바다 건너 아라사 동쪽 변경으로 나왔고 이듬해 만주 북쪽의 밀산(蜜山)으로 이주했다. 이때 중화가 비로소 나라다워지자, 대총통 원세개(袁世凱) 공에게 요순의 선양(宣讓) 제도와 주공 및 공자가 주창한 덕예(德藝)의 교과를 복원하라 청하며 세 번의 편지를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계축(1913) 5월에는 만주 서쪽의 안동현(安東縣)으로 옮겨 남쪽의 선비들과 서쪽 유람을 논의했다. 이어 동삼성 한인 공교 발기회(東省韓人孔敎發起會)를 조직해 12월 북경에 들어가 공교(孔敎) 총회에 이름을 올리고 지부 설립을 승인받았다. 틈이 날 때 같은 조직의 제군(諸君)과 더불어 교과(敎科)의 진행 방향이나 관복의 의례 및 우리 선친의 《이학종요(理學綜要)》·《사례집요(四禮輯要)》·《춘추집전(春秋輯傳)》의 대의를 강론했다. 갑인(1914) 2월, 다시금 원세개 총통에게 편지를 보내 ‘국용(國用)·국난(國亂)·국헌(國憲)·국교(國敎)’, 이 네 가지 일[四事]을 논했으나 또다시 회신이 없었다. 이윽고 남쪽의 곡부(曲阜)로 떠나 공자와 자사의 묘와 주공과 안자(顔子)의 사당을 배알하고, 공자의 고향 ‘궐리(闕里)’에 선친의 ‘삼서(三書)’를 소장시켰다. 3월에 북경으로 돌아왔고, 한 달 뒤 동삼성으로 돌아가 봉천(奉天)에 당도하며 여정을 마쳤다. 아! 이것이 내 생애 첫 유람이었으니 혹 이것보다 나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한 곳의 넉넉한 장소를 점유해 우리 한인(韓人)들이 함께할 곳을 얻었으니 그곳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강명(講明)하며 이 첫 유람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아래에 그간의 행력(行曆)을 대략 기록해 둔다.
--- 「서(序)」 중에서

(전략) 고려문의 서쪽은 산세가 웅준(雄俊)하고 길머리[路頭]가 이리저리 꺾이고 굽어 있는데, 22개의 굴을 지나서야 비로소 구름 속에 우뚝 솟은 봉황산을 볼 수 있었다. 산 아래의 국면은 반듯하게 펼쳐져 있는데 봉황성(鳳凰城)이 여기에 있다. 일설에는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이라 한다[고구려 사람들이 큰 새[大鳥]를 안시(安市)라 불렀기에 성 이름이 되었다 하고, 혹자는 성의 남쪽 수십 리에 별도로 안시성이 있다고도 한다]. 성주(城主) 양만춘(楊萬春)이 화살로 당나라 황제의 눈을 적중했다고 하는데, 이는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흰 깃이 눈에 떨어졌도다(白羽集玄花)”라고 읊은 시를 따른 것이다. 하나 지금의 눈앞에는 이러한 흔적 없이 온통 변발한 만주족과 창(槍)을 찬 일본 군인뿐이니, 앞선 시대의 영향을 찾아보려 한들 그런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략)
--- 「공자 2464년 계축(癸丑, 1913) 음력 12월 초2일 계미(癸未)」 중에서

이용[李鏞, 본명은 종승(鐘乘)으로 북청 사람. 판사 이준(李儁)의 자제]이 와서 지나온 일들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과거 해삼위에서 동고동락했다). 또 연길부(延吉府)의 한인 공교회(韓人孔敎會, 북간도의 한인들이 개별적으로 공교회를 세웠다)와 간민회(墾民會) 사이의 알력 다툼에 대해 일러 주었다. 대개 간민회는 야소교와 신학문을 배운 사람이 다수인데 이들이 서로 교섭해 부(府)에 모임을 만들어 일정 정도의 단체를 완성했다. 그러자 외부 사람들은 이를 거북하게 여겼고 농민들 또한 연회비[年金]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며 때마침 나이 든 여러 어른이 설립한 공교회도 평소 기세등등한 신학을 언짢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간사한 이간꾼들이 부추기자, 농민회와 공교회가 함께 분노해 간민회에 행패를 부리고 관청에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번져 윗선을 범하고 소란까지 일으키자 관청에서는 마침내 병졸들을 파견해 겁박한 뒤 주동자를 잡아다 곤장을 치고 옥에 가두고 말았다. 천하를 떠도는 같은 민족끼리 서로 미워하고 악의를 품고 있으니 생각할수록 탄식이 몰려왔다.
--- 「12월 24일 을사(乙巳)」 중에서

기인이 공교회에 갔는데 진환장이 내게 저작을 부탁하면서 문묘(文廟) 제사 때의 관복 제도에 관해 물었다고 했다. 이문치가 자신이 쓴 《사언운어(四言韻語)》를 보내오며 평가를 부탁했다. 이상익이 북만주 밀산에서 동고동락했던 그의 형 참찬 이상설의 편지를 가져왔는데, 만 리 떨어진 그곳에서 보낸 정이 헤아려져 읽는 내내 눈물이 났다. 또 ‘조선의 공교회는 반드시 세계 각국의 정치적 영향력 밖에 있는 우리만의 공간에서 자립해야 합니다’라고 썼는데, 이는 우리가 헤어질 때 서로 확약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돌아보면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그들의 힘을 빌리거나 당대의 권력에 주목하고 있으니, 이 또한 우리의 역량이 미치지 못해 그런 것이다. 그렇게 편지를 써서 답신을 보내 감사의 마음을 전했지만, 망연(茫然)해진 내 마음의 곡절을 이루 다 펼쳐 내지는 못했다.
--- 「1월 21일 임신(壬申)」 중에서

날씨가 갰다. 공상림이 곡오(曲五)에게 마차를 불러 나를 데리고 동문을 나서게 하니, 먼저 주공묘를 참배했다. 주공의 후손 주동야(周東野)는 성안에 살고 있는데 궁핍에 억눌리며 지내고, 그의 주손은 박사를 지냈는데 고질병으로 인사불성 상태라고 했다. 주공묘는 본디 노성(魯城)에 있었는데, 성이 옮겨짐에 따라 성 밖에 남겨져 현재는 담장과 행랑이 기울어지고 무너져 있었다. 계단 앞에는 해목(楷木)이 숲을 이루고 남아 있었는데 그 열매는 대두(大豆)와 비슷하고 가을이 되어 익으면 상당히 달다고 한다. 묘 안의 성상(聖像)·곤룡포·면류관·제례에 쓰는 홀(笏)은 멀리 〈벌가(伐柯)〉의 시의(詩意)를 떠올리게 했다. 동쪽에는 노공(魯公)을 배향했고 서쪽에 작은 상을 놓고 ‘금인(金人)’이라 불렀는데 함구무언의 모습이었다. 재배하고 홀로 고문을 읽고는 화로에 나아가 공경히 사르고선, 아득한 옛일을 우러러보니 현재가 참담하게 다가와 흐르는 눈물이 굵어졌다. 문을 나와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아! 정녕 주공께서 다시 이 세계에 재림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한탄했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노나라 제공의 주패(主牌)를 모셔 두었는데 흙먼지가 쌓인 채로 있어 차마 눈 둘 곳이 없었다.

마차를 돌려 서쪽으로 돌아드니 넓고 평평한 들판에 봄 풍광이 활짝 펼쳐져 있어, 대저 이곳의 기후와 풍속이 우리나라와 크게 비슷하게 느껴졌다. 다만 서양의 옷과 만주족의 변발이 거리에 잔뜩 섞여 있어 보면 볼수록 참담함이 일어났다. 과거 청나라 순치(順治) 연간(1643∼1661) 때 섬서(陝西) 땅에서 벼슬하던 공문담(孔文譚)이 공씨의 자손들에게만큼은 치발(薙髮)을 면해 달라 청했다. 그러자 조정에서 그 직위를 영구히 박탈해 버린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내가 공상림의 댁에 머물 때 학동들과 일꾼들이 다투듯 몰려와 나의 갓과 의상을 보고는 다들 괴이하게 여겼는데, 이미 익숙해진 풍경이다. (하략)

--- 「2월 27일 무신(戊申)」 중에서

출판사 리뷰

망국의 통한을 안고 구국(救國)과 구도(救道)의 길을 걷다

“내 목을 벨지언정, 이 머리칼만은 자를 수 없다.” 유교적 세계관이 곧 정체성이었던 구한말 유림에게 일제의 침략과 강제적인 근대화는 곧 세계의 종말과도 같았다. 쏟아지는 제국주의의 폭력 속에서 전통 문인들은 의병을 일으키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망명의 길을 택하며 온몸으로 저항했다.

《서유록(西遊錄)》은 상소와 국채 보상 운동 등 국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항쟁을 시도하다 끝내 해외 망명을 택한 노유(老儒) 이승희의 근대 중국 유람기다. 책에는 일흔을 앞둔 그가 1913년 겨울 중국 안동에서 출발해 1914년 봄 심양으로 돌아오기까지, 북경과 공자의 고향 곡부 등을 거친 119일간의 여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무려 6500리에 달하는 이 멀고 험한 길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구국’의 길이자 희미해져 가는 유교를 회복하기 위한 ‘구도’의 절박한 행보였다.

그러나 부모를 찾는 아이의 심정으로 당도한 공자의 땅에서 그가 목도한 것은 ‘중화’가 지워지고 ‘민국’이 들어선 낯선 현실이었다. 자신의 전통 복장이 한낱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중국 공교회가 무능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깊은 실의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좌절에 머물지 않았다.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대신, 척박한 땅을 떠도는 이주 한인들의 삶을 보듬고 독자적인 유교 공동체를 건설하는 주체적인 ‘실천’을 위해 다시 굳건히 발걸음을 옮긴다.

이 책에는 신생 중화민국의 안팎을 예리하게 관찰한 시선과, 이역을 떠도는 망국 유민의 처연한 심사가 95수의 한시와 함께 곡진하게 펼쳐진다. 특히 의암 유인석, 석주 이상룡 등 노선이 달랐던 독립운동가들과의 허심탄회한 교류, 모어를 잃어버린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위로했던 일화 등은 1910년대 재중 한인들의 인적 네트워크와 끈끈한 독립 의지를 여과 없이 보여 준다.
《서유록》은 ‘근대’라는 격랑에 맞선 당대 유림의 실천적 지성과 꺾이지 않는 생명력이 빚어낸 훌륭한 한문학 작품이다. 나아가 한·중 유림의 연대 기원과 한국 독립운동사의 숨은 이면을 밝혀 줄 귀중한 역사적 사료로서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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