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사상 검사들 사이에 가혹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있었지요. 마치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만이 임무에 충실한 것인 것처럼 말이에요. 또 그렇게 하는 검사일수록 이름을 드날렸지요. 김 검사는 그러한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지요. --- p.40
어느 날 밤이었어요. 저 혼자 잠이 들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뜨고 있는데, 그때까지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거대한 의혹의 그림자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꼈어요. 그것은 바우님이 잡혀 들어가신 뒤 그때까지 제 머릿속에서 막연하게나마 서서히 커오던, 일정한 방향도 그리고 형체도 잡을 수 없는 그런 의혹이었어요. 그것이 그날 밤 갑자기 선명히 정체를 나타내면서 저에게 하나의 답을 주었던 거예요. --- p.52
“자수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거의 다 돼가는 판에 그만두기가 억울해서 그럽니다. 양달수 사건은 보통 살인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엔 굉장한 흑막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그걸 넘겨!”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다른 사람한테 넘길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 p.100
“이 무덤 정말 말썽 없겠어?” 쉰 목소리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주인이 없는 게 확실합니다. 벌초도 안 해서 거의 묻혀 있지 않습니까.” 사내 하나가 말했다. “빨리빨리 해. 날 새기 전에 해치워야 하니까.” 쉰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무덤의 거죽이 벗겨지자 그다음부터는 얼어 있지 않아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어 나갔다. 건장한 사내들은 힘이 좋았기 때문에 쉬지 않고 파 내려갔다. --- p.109
“내가 누군 줄 아슈?” 태영이 또 엉뚱한 질문을 던져 왔다. “그럼, 알고말고.” “난 사형수야. 나는 곧 사형될 거야.” “알고 있어.” “오늘 밤 꼭 내보내 줘. 부모님이 보고 싶어.” “그래, 그렇게 해.” 정신이상자를 붙들고 무엇을 알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캐낼 수 있는 한 캐내야 했다. --- p.208
흡사 꿈을 꾸면서 빙판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이 상태에서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아무도 모르 는 곳으로 훌쩍 떠나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더 이상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불행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불행한 모습을 보고 불행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실로 우울한 일이다. 더구나 거기에다 또 하나의 괴로움을 안겨 준다는 것은 더욱 못할 짓이고, 견딜 수 없도록 괴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