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다다는 예술운동이 되기도 전에 싱겁게 끝나 버렸지만 정지용, 박팔양, 오장환, 임화, 이상 등 당시 주요 시인들은 ─ 뒤에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 다다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 1920년대 초의 문학청년들은, 말하자면 홍역을 치르듯이 다다의 계절을 거쳤다. ……당시 한국의 주요 작가들은 고한용의 초대로 1924년에 서울을 방문한 쓰지 준을 환대하면서 호의와 관심을 보였다. 시인 서정주는 1939년에 두 번째로 서울에 온 다카하시 신키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한용은 1926년경에 붓을 꺾었으며, 전후 한국의 문학 연구자들도 다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니, 고한용은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고한용은 한때 쓰지 준, 다카하시 신키치, 아키야마 기요시 등 일본 다다이스트나 아나키스트와 같은 시대의 분위기와 사상을 공유하는 동료였다. 식민지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일본어 서적으로 기초 교양의 상당 부분을 기른 조선과 일본 문학청년들의 심리적인 거리감은 아마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다다이스트 고한용과 친구들’의 ‘친구’는, 그와 직접 교류했던 사람만이 아니라 널리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 ─ 유명 인사뿐만 아니라 무명의 인물까지 ─ 도 포함한다. 이제부터 고한용과 함께 개성, 경성, 동경, 미야자키, 그리고 전후의 서울로 다다적 산책을 떠나 보기로 한다. ---「머리말」중에서
한국 근대문학사를 보면 동경 유학을 간 문학자에 관해 ‘니혼 대학 예술과(또는 미학과)’라는 기술을 자주 만나게 된다. 개성 출신인 고한용, 마해송, 고한승 외에도 작가 최승일, 김영팔, 뒤이어 시인 임화, 김기림, 음악 평론가 박용구, 시인 김춘수 등이 있다.
예술과 이외에도 전쟁 전에 니혼 대학에 다닌 문학자는 많다. 작가 한설야(사회과), 시인 이용악(학과 불명), 작가 이원조(학과 불명), 시인 구상(전문부 종교과 졸업), 작가 손창섭(법학과 중퇴), 정비석(학과 불명)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육사도 전문부에 적을 두었다고 한다. ……1차 대전 이후 전 세계를 휩쓴 데모크라시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교육 기회를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 결과 1918년에 ‘대학령’이 공포되어 사립대학 졸업자도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20년에는 게이오, 와세다, 메이지, 주오, 호세이, 니혼 대학이 ‘대학령에 의한 대학’으로 인가받아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2장 동경 유학」중에서
놀라운 것은 조선인 아나키스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박열이 니혼 대학에 재적했다는 사실이다. 1948년판『조선연감』(서울: 조선통신사)에는 “니혼 대학 수학”이라고 나와 있으며, 다카하시 신키치의 글에도 “박열은 ……니혼 대학 재학 중 1923년 9월의 대지진을 겪고 천황 암살을 계획했다고 해서……”(「도스토옙스키와 박열」)라는 기술이 있다. 학과는 써 있지 않지만 아마 전문부 사회과였을 것이다. 박열의 최종 학력은 대부분의 자료에서 경성고보 또는 세이소쿠 영어 학교로 되어 있다. ……관립 학교의 일본인 교사는 대체로 질이 낮았지만 가끔 재미있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역사 선생은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세계인이라고 하면서 조선인 학생들이 독립의 뜻을 갖도록 부추겼다고 한다. 사범과 시절의 박열은 기노시타 나오에, 나쓰메 소세키, 오가와 미메이, 다케고시 산사, 구로이와 루이코 등의 책을 즐겨 읽으면서 지식을 넓혀 갔다. 그런 점에서는 동시대 일본 청년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외국인 선교사가 직접 영어를 가르쳐 주는 기독교계 사립학교 등을 다니지 않는다면 조선 학생들은 영어를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유학 가면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입시 학원이나 영어 학교에 다녔다. ……가네코 후미코처럼 상급 학교에 진학 못한 젊은이들도 한을 푸는 것처럼 영어 학교에 다녔다. 박열과 후미코가 만난 곳도 세이소쿠 영어 학교였다. 이어서 박열은 오스기 사카에를 비롯한 일본 아나키스트의 사상을 접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2장 동경 유학」중에서
기독교나 시라카바파풍 인도주의, 사회주의를 신봉할 때 느끼는 모든 정신적 압박, 예를 들면 의무감이나 자책감 같은 것에서 풀려나는 계기를 쓰지는 다다에서 얻은 것이다. ……고한용은 쓰지의『데스페라』를 통해 해방되었다. ……그보다 약간 나이 어린 임화는 다카하시 신키치의 시집이나 다다 미술을 통해 다다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감상적인 시를 썼던 임화도 다다를 알게 된 뒤 감상주의와 결별했다. 그것은 기성 제도에 대한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세계관 자체의 전환이었다.
슈티르너나 셰스토프 작품의 번역과 사색적인 에세이로 자유를 갈망하는 문학청년들의 우상이 된 쓰지 준은 다다이스트이자 니힐리스트였다. 아키야마 기요시는 쓰지 준에 관해 “인간의 생존과 생활을 침범하는 모든 사회조직,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국가와 국가권력에 대해 특히 반항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이라고 평하면서 ……아키야마는 “전쟁 전의 사상 통제 시대, 충군애국이 일본인의 도덕적 지표였던 시대에 이 발언은 놀라웠다”라고 평한다. 혁명으로 태어난 국가라 해도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이 되면 쓰지는 당연히 싫어했다. ---「2장 동경 유학」중에서
1926년 4월, 고한용은 아키야마 기요시와 함께 ……쓰지 준을 찾아가 셋이서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때의 상황을 그린 아키야마의 글은 고한용과 쓰지의 인상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
그들과 삼국동맹을 맺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나는, 여기서 해산할까?라고 했지만 쓰지와 고한용은 좁은 인도 위에 서서 뭔가 의논한 후, 한잔하자고 하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집의 유리문을 열었다.……
“사실은, 나, 일본 사람이 아니야. 샤쿠하치도 못해. 시늉만 하는 거야. 일본 사람을 흉내 내고 있지만 나는 중국 사람이지.” 그런 말을 태연하게 했다.
그리고 나를 가리켜 “이놈이 조선 사람”, 고한용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놈은 일본 사람. 우리는 삼국동맹이야”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중국 노래 할게.”
쓰지는 식탁을 가볍게 치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빠른 속도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뒷골목에는 간토 대지진의 잔해가 아직 남아 있던 40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때의 쓰지 목소리와 노래의 쓸쓸한 느낌이, 내 속에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믿어 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것은 그런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기억이다. ……(아키야마 기요시,「삼국동맹」)
---「4장 다시 동경, 그리고 미야자키」중에서
다다를 자칭한 조선 청년들이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물결에 휩쓸린 내적 계기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즉 다다에는 무엇을 하면 된다는 “구체적인 단서”가 없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좋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실천 목적이 분명한” 사상이 유행했을 때 그 “정당한 논리” 앞에, 다다에 다소 물든 정도의 청년들이 간단하게 굴복하고 말았다.
박팔양(김니콜라이)이 1927년 1월에 발표한 다다 시「윤전기와 사층집」의 맨 끝에는 “고따따, 방따따, 최따따, 죽었는지 살았는지 적적무문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의 다다는 1924년에 시작하고 1926년 말에 대체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다다만이 아니라 오스기 사카에의 죽음으로 구심력을 잃은 일본 아나키즘도 역시 급속히 퇴조했다. 1927년 1월에 발간된 아나키즘 계열의 잡지『문예해방』도 쓰보이 시게지 등 동인들의 일부가 마르크스주의로 옮기면서 1년 만에 끝났다. 이어서 쓰보이 등은 나프(NAPF,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 결성에 참여한다. ---「4장 다시 동경, 그리고 미야자키」중에서
다카하시 신키치가 50년 동안 소식이 없던 고한용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아나키스트 박열이 1974년 1월 18일에 평양에서 세상을 뜨고 얼마 지났을 때의 일이다.
신키치는 그 편지의 일부를「도스토옙스키와 박열」에 소개했다.
……귀하가 조선에 오신 것, 제가 귀댁을 찾은 것, 마지막에 규슈 노베오카에서 만난 것 등이 생생한 기억인데 지금 생각하면 다 꿈같습니다. 그 뒤 쓰지 준 씨나 요시유키 에이스케 씨도 돌아가시고, 기쿠무라 유키코도 다 같이 저승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돌이켜 보면 인생은 덧없습니다.……(1974년 2월 19일자 편지)
---「5장 그 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