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목적지 오죽헌은 경포대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오죽헌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큰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거든요. 다른 곳으로 잘못 들기를 여러 번, 고생 끝에 겨우 입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죽헌 앞에서는 새로 만들어지는 고액권(5만 원권과 10만 원권)에 새길 인물로 강원도 여성단체에서 신사임당을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화폐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얼굴이 새겨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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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여긴 공원인데, 왜 탑이 서 있어요? 우리 학교 운동장에 있는 탑이랑 비슷해요.”
“지형아, 저 탑은 원각사지십층석탑이야. 조선 초기 석탑으로 국보 제2호란다.”
“그런데 왜 여기 있어요? 여긴 할아버지들 놀이터 아니에요?”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높이 12미터로, 120년 전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경천사십층석탑을 모방해 만든 탑입니다. 탑신부는 층층이 아름다운 기와집을 모각해 기둥, 난간, 공포, 지붕의 기왓골까지 섬세한 수법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옥신에는 수많은 부처, 보살상, 천인 등과 구름, 용, 사자, 연꽃, 모란 선인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럼 저 탑도 돈에 모델이 된 적이 있어요?”
“1952년과 1962년에 발행된 종이돈에 탑골공원과 원각사지십층석탑이 그려졌단다. 탑골공원은 규모에 비해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어.”
“할아버지들이랑 비둘기가 모여 쉬는 공원인 줄로 알았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안에, 이런 문화재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모르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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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사는 1975년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입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현판을 달고, 이 자리에 있던 어제각을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화재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있는 그대로 보존해 조상들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p.16
“아빠, 먼 미래의 아이들이 지금 우리처럼 유적지를 여행하면서 숭례문 방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를 많이 원망하겠죠?”
“지금 우리가 일제시대에 훼손된 유물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처럼?”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요즘엔 과학도 발달하고 건축 기술도 발달해서 아마 거의 똑같이 복원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손길은 느낄 수가 없잖아.”
승완이랑 지형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숭례문 화재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줄 것 같습니다.
--- p.130
임진왜란을 겪으며 농토가 황폐해지고, 농민들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세금을 거둬들이기도 힘들었습니다. 조선은 경제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고, 그중 하나가 화폐의 제조와 보급이었습니다. 동전 제조 사업은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었고, 국가에서 재물을 써야 하는 곳에 화폐를 대신 사용함으로써 재물을 아껴 둘 수 있었습니다. 또한, 상평통보가 널리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초기 상공업의 발달로 상품 교환 경제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또 세금을 화폐로 걷으면서 상평통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팔기가 쉬워지자 상업은 더욱 발달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지게 된 사람들은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주는 고리대금업으로 더욱 부자가 되었습니다. 돈을 빌려 쓴 농민들은 비싼 이자를 갚기 위해 고향을 떠나 수공업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상평통보라는 화폐로 인해 조선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 pp.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