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진 길을 내려오면서 모처럼 아내의 손을 마음 두어 한번 잡아본다. 온기가 가냘프게 건너온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마디가 투박하기는 하나 너무 애처롭다. 아내한테 너무 무심하게 대했던 지난날들이 잠깐이나마 송사리가 노니는 여울을 만들어 흐른다. 그동안 웃음소리가 한 번이라도 울타리를 넘은 일이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냥 따라오던 아내가 큰길로 들어서자 힐끔 쳐다보더니만 모처럼 잡은 손이 어색했던지 이윽고 빼낸다.
“이거 노소. 와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라노. 남들 보는구마.”
“허허 참, 너머질까 싶어 그런다.” --- p.45 중에서
“지는 게 이기는 건데, 그 나이가 대자문 그런 건 충분히 알 사람들이……. 그리고 힘읍는 사람이 져조야지.”
“…….”
“힘읍는 사람이 이길려고 하이까, 일이 크게 벌어지는 거 아이라.”
처음엔 그냥 들어 넘겼는데 두 번째 이야기에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놓았다. 그냥 들으려니까 좀 그랬다.
“반장님도 참,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요. 그건 그래 얘기해선 안 대죠. 힘읍는 놈이 대들자면 그게 오죽했겠수.” --- p.203~204 중에서
“한마디로 실패작이지 머. 모르긴 해도 아매 우리 경비원들이 대개 그럴 거야. 그런 식으로 살고 있을 거라구.”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두고 온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으로 명멸한다. 어깨 한번을 못 펴보고 산 구질구질하고 기진한 세월이었다. 꼬여도, 꼬여도 그렇게 꼬일 수가 없는 인생역정. 속절없이 내닿는 세월 속 한 구석자리에 끼어, 꼴에 남 먹는 나이 다 먹고, 빠지면 탈날까 봐 남 하는 고생바가지 다 덮어쓰고, 등신짓은 혼자 하면서도 안 그런 척, 그런 인간말짜로 남은 꼬락서니가, 자신이 봐도 너무 가련하고 애처롭다. 이런 날은 어디 가서 가슴을 까집어놓고 실컷 한번 울어봤으면 싶은 마음뿐이다. --- p.290~291 중에서
“우리 을반에 재미있는 사람들이 만쿠마. 107동에 수필 쓰는 사람, 그 사람은 얄팍한 책도 하나 냈더라고. 또 101동에 있는 그 친구는 쉬는 날마다 오후엔 양로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대요. 그런 거 보믄 몸은 경비원으로 살아도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는 거 아입니까.”
“부끄럽습니다. 굼벵이도 궁구는 재주는 있다 카는데, 난 그렁 거도 하나 읍시 살았스이.”
군대 있을 때 사격으로 상장 하나 받은 것이 모두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것도 나중에 들으니 옆 사람이 잘못 겨눠 그의 타킷을 쐈다는 후문이었다.
“누가 실패도 하나의 성과라 그러더라고. 그래 알고 살아보는 거지 머.” --- p.298 중에서
“아파트 경비원, 실패한 월급쟁이들의 종착역이 모두 여기라고 그라는데, 누가 머라건 우린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제. 아파트가 안 생깃다 그래바, 이 많은 경비원들이 어디 가서 얻어 묵고 살 거여. 경비원 숫자가 이 나라 군인 숫자만큼 댄다는데. 안 그렇소?”
“월급쟁이들의 종착역이라, 그래 들으이 참 멋있심다.”
“실패란 말이 빠지믄 안 대지. 성공한 월급쟁이는 아잉게.”
“실패한 월급쟁이들의 종착역에다가 샌드위치 세대라, 정말 오늘 울 반장님 명강의를 하신다. 이런 이야기, 여게 말고 어댈 가서 듣겠어요. 오늘 증말이지 마이 배우는구마.”
“시절 돌아가는 거 보이 대접받아 가믄서 살기는 다 텃고, 나이가 무슨 벼슬아치도 아인데, 우리 입으로 자꾸 떠들어바야 노망했다 칼 거고……. 기냥 이대로, 사는 대로 살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줘야지요.”
--- p.298~299 중에서